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계 ..

첨부 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계 3:1-6) 

사도 요한의 다섯 번째 편지가 사데 교회 사자에게 보내졌습니다. 
주께서 사데 교회를 가리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로 상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소수에게 있는 순결을 칭찬했습니다(계 3:4-5). 
사데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것은 저급한 형식주의였습니다. 형식주의는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데 교회는 실천과 행위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진리 수호에 대한 책임과 사명이 없으면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딤후 3:5).
주님은 사데 교회 사자에게 죽게 된 것을 다시 일으켜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굳게 하는 방법으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의로운 흰 옷을 입히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될 뿐만 아니라 다시 인정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계 3:5). 사데 교회 사자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해주신 분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Ⅰ. 사데 교회의 진상眞相입니다. 

사데(Sardis)는 서머나 동쪽 85km 두아디라 남쪽 48km 지점에 위치한 옛 루디아(리디아)왕국의 수도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사데 교회를 답사할 때의 기억은 붉은 벽돌집이었고 당시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매우 웅장했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교회 뒤쪽으로 자그마한 야산이 있었고 제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교회 뒤쪽 언덕으로 콩을 경작하는 척박한 밭이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사데는 군사상 상업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사데는 전략상 요새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적들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습니다.
사데가 요새인 것을 감안할 때 로마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항복하고 통치권을 그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주후 17년에 대지진으로 사데도시는 파괴되었으나 로마의 원조를 얻어서 다시 재흥되었습니다.

사데는 모직물과 염색 공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물질적 부요와 함께 사치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키벨레(Cybele)여신을 섬기는 밀의종교密儀宗敎가 성행했는데 그 종교의식은 부도덕하고 난잡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여타 아시아 교회처럼 외부적인 핍박과 환란은 없었지만 도시 전체가 가지고 있는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영적 죽음은 외부 환경과 절대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몇몇이 타락했고(계 2:14) 두아디라 교회는 많은 이들이 이세벨에게 미혹당해 실패한 반면(계 2:24) 사데 교회는 대부분이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에는 소망은 있었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소망을 전제한 책망입니다. 주님은 기대가 없으면 책망도 없습니다.


Ⅱ. 사데 교회에 대한 책망입니다.

1) 죽은 전통입니다.

본문 3장 1절에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사데 교회가 과거의 명성만 고집한 채 현재는 영적으로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데 교회는 외부적 핍박이 가장 적은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 교회 본연의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 죽은 자 』라는 말은 이른바 묘지신앙, 영안실신앙을 말합니다. 
전통만을 고집하고 현재에 창의력을 통한 새 것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그것은 바로 죽은 전통입니다. 

유가 사상이 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입니다(옛 것을 제대로 알아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이 바로 경경위사經經緯史(불변의 진리를 날줄로 시대에 따른 변화하는 양상을 씨줄의 관계로 엮은 것)정신입니다. 
18세기 조선중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에 의해 제창된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하는 것)은 온고이지신보다 더 역동적입니다. 과거를 통한 새 것의 창조 없이 전통만 자랑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2) 형식주의(Formalism)입니다. 

본문 3장 1-2절에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7절에 『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선을 가장한 위선僞善입니다. 
선의 반대는 악입니다. 이 악이 바로 위선僞善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했습니다.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데 교회가 외부적으로는 거창한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허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온전함은 물리적이나 철학적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요 17:32; 요이 1:12; 요일 1:5).


Ⅲ. 사데 교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본문 3장 4절에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나 그 가운데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받은 구원의 은혜에 합당하게 행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옷이 더럽다는 것은 기독교적 순결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유다서 1장 23절에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고 했습니다.

『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에서 "몇 명"(올리가 오노마다, )은 문자적으로 소수의 몇 이름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순결보다도 신본주의적 삶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라도 완벽한 도덕적 순결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본주의적 삶 속에는 회개를 통한 바르게 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Ⅳ.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소망의 메시지 입니다. 

본문 3장 3절에 『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 대해 세 가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너는 지키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너는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에 대한 승리 강령입니다. 

본문 3장 5절에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데 교회에 대한 세 가지 명령에 이어서 그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1)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이 첫 번째 약속입니다. "흰 옷"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의를 의미합니다. 죄나 이교도적 혼합주의에서 분리시켜 자기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흰 옷은 다니엘서에 기초한 사상입니다. 

다니엘 7장 9절에 『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라고 했습니다.
흰 옷은 하늘에서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받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4절에 『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2)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명책은 신구약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영혼들은 생명의 부활을 받고 그렇지 못한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에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시민권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20절에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3)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10장 32절에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말씀과 병행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 나라 시민임을 공적으로 시인是認(어떤 사실이나 내용이 옳다고 인정함)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시인是認은 법적인 용어로 증언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2장 8절에 『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무리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를 통하여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붙들고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미가를 통하여 450명의 시드기야 무리를 격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진리의 종들을 통하여 중세시대 천년의 암흑기를 청산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2:32).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없는 전통은 죽은 전통입니다.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익숙한 것으로부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개혁주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교리 논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개혁주의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한 음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소리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신조는 코람데오(CORAMDEO, 하나님 앞에서) 사상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행하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3장 13절에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 아시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것보다 더 완전한 앎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은 다 몰라도 하나님 한 분만 아시면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지기 때문에 언제나 담대하고 언제나 이타적이고 그의 주변은 언제나 새롭고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