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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섬기는가? 거짓 신을 섬기는가? : 거짓 신들 (롬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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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가? 거짓 신을 섬기는가? : 거짓 신들 (롬 1:18~23)
 
하나님의 자리를 뺏는 거짓 신들이 많습니다. 

하덕규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중에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는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하나님 없는 실존의 흔들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속에 가시나무와 같이 찢겨지는 아픔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아주 애절한 가사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내 참된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던 삶의 차고 시린 날들, 마치 수많은 가시나무가 있는 숲과도 같은 날들 속에서 상처받은 자기 실존을 고백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당신’이란, 나의 참자아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이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예수님,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내 안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내 자아가 내 안에서 쉴 수 없다는 인간의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내 자아를 흔들고 있는 신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를 미혹하는 신들, 내 속에 하나님을 둘 수 없게 만드는 거짓 우상들, 그리고 짝퉁 하나님이 우리의 삶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신(神)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 아는 사람을 전문가라고 합니다. 또 특정 분야에 특출한 사람을 달인이라고도 하고,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을, 공부의 신, 직장의 신, 예능의 신, 소리의 신, 연기의 신이라고 사람들은 예찬합니다. 뛰어난 운동선수에게도 농구의 신, 축구의 신 등의 이름을 붙이고, 이제는 먹기를 열심히 탐하는 사람을 식신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아이돌 중에는 ‘인피니트’, 즉 무한한 존재라는 의미의 팀이 있습니다. 동방의 신이 일어난다는 ‘동방신기’도 있습니다. 아예 대놓고 ‘GOD’라는 이름을 붙인 팀도 있습니다. 이것을 차마 ‘갓’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서, 철자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 ‘지오디’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까?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우리를 위로해주고, 우리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신들을 그리워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때 만들어 놓는 ‘짝퉁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영국의 무신론자들이 버스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써 붙였습니다. “There i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아마도 하나님은 안 계실 거야. 그러니 근심을 그만 두고, 네 인생을 즐겨라.)” 그러자 또 다른 광고가 떴습니다. 무신론자들의 광고에 대항하는 문구였습니다. “There is God. BELIEVE. Don't worry and enjoy your life.(하나님은 계시다. 믿어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을 즐겨라.)” 

무신론자에게는 정말 하나님이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수많은 신들을 자기 속에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하는 다른 신들을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수많은 거짓과 짝퉁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대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익한 신들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어떤 주제의 이야기에 갑자기 열을 내고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큰 소리를 치게 된다면, 무엇인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갖게 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게 하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거짓 신들로 다가온 것들입니다. 또 여러분은 시간과 돈을 어디에 제일 많이 쓰고 있습니까? 먹는 것입니까? 쇼핑하는 것입니까? 오락입니까? 운동경기입니까? 아니면 자녀들을 키우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우리를 붙잡는 신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신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욕망과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원이 있다는 뜻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와 욕망에 내가 스스로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기초를 그 욕망에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나를 노예처럼 부리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속에 ‘저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될 텐데...’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갖고자 하는 달란트입니까? 아니면 권력이나 명예입니까?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어느 날 그것은 ‘나 자신만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중독증 환자처럼 거기에만 몰두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기도 합니다. 신적인 마력을 갖고 우리의 삶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모든 것이 신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보통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음식의 신입니다. 먹는 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입맛이 생긴다는 건 건강하다는 표시이고, 또 잘 살고 있다는 표시 아닙니까? 

그런데 먹는 이야기만 나오면 마냥 즐거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식가를 넘어서 탐식가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매일 다이어트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음식에 대한 관심이 깊으면, 음식이 내게 신처럼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섹스의 신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수가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곳곳에 성을 주고 파는 광고 전단지가 붙어있습니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핸드폰을 켜기만 하면, 우리는 성을 마음대로 사고파는 사회 속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섹스의 신이 이 시대의 신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락의 신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신흥 종교의 교주를 섬기는 것과 같다.” 야구, 축구, 농구, 골프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유니폼을 입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의 얼굴이나 프로필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찬양하듯이 모일 때마다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합니다. 그것도 두 시간, 세 시간을 말입니다. 언제 한 번 그렇게 열심히 찬양해 보신 적 있습니까? 

매일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기록을 보니, 무려 한 달에 이천만 명 이상이 영화를 본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천만,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인 영화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셈입니다. 

또한 게임중독은 어떻습니까? 부모도 쳐다보지 않고, 먹지도 않고, 게임에만 빠져 있습니다. 중, 고등학생들이 그렇고 심지어 대학생들도 그렇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게임을 합니다. 연구실에서도 게임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시간과 정열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놓으며 다른 사람과는 단절합니다. 가족과 단절하고, 친구에게서 소외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거실은 어떻습니까? 누군가는 “많은 현대인들은 각자 가정 안에 하나씩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로 TV신입니다. TV는 가정의 정중앙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거기에 몰두합니다. 모든 의자들은 어디를 향해 놓여 있을까요? 바로 TV를 향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쪽에 앉든지 항상 TV가 중앙에 놓여 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재물의 신, 명예와 권력의 신을 향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놓습니까? 성공의 신, 성취의 신을 바라보며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꿈꾸던 것을 이루어, “보라 나처럼 잘난 사람 있는가?” 소리쳐 보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도 실패하면 낙담하고 죄의식과 열등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저 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미움과 분노의 또 다른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이 시대, 그 속에 우리도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다른 형태의 신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의 신입니다. 특별히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내 아들과 딸들에게 집어넣습니다.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킵니다. 내 바람을 투영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나와 내 아들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 내 남편도 여기에는 못 들어온다. 내 다른 자녀도, 친구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아니 하나님마저 내 아들과 나 사이에 끼어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녀는, 어릴 때는 우리가 보살피고 잘 키워야 하는 존재이지만, 성인이 되면 꽉 잡은 손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들은 아들답게, 딸들은 딸답게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부모들의 올바른 교육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아들이 신이 되고, 내 딸이 신이 됩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 평안과 만족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우리의 이런 모습을 간파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피조물의 다른 것들로 바꾼 모습은 형태만 다를 뿐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왜 참된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아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조차도 왜 거짓된 신들을 향해서 달려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안정감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들은 잠깐의 위로와 안정감, 그리고 쾌락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것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참된 위로가 있던가요? 우리에게 정말 평안한 마음을 주던가요? 
예수님은 요한복은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이다. 나는 영원한 평안, 하늘로부터 주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니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짓 신들을 향해서 달려가는 두 번째 이유는 마음이 허전하기 때문입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일시적인 만족감을 향해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 신들을, 찰나적인 즐거움을 내 인생의 기반으로 삼으면 그것들은 곧 무너집니다. 그래서 다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아 8장 10절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힘과 능력이 있으려면,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우리 마음이 열등감에 의해 응어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도 해보고 싶고, 저런 것도 소유하고 싶고, 세상에서 성공해서 성취감도 누려보고 싶은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열등감을 헤치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이런 존재야. 전부 내가 이룬 것이야.”하고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잠깐의 자존감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자존감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도 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내어놓으셨다는 것이 곧 복음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것이 풍파 일고 바람 부는 이 세상에서 이겨나갈 수 있는 자족감, 자존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른 신들과 경쟁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신들 중에 내가 최고의 신이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거짓신이라는 것입니다. 헛된 것,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생명이시고, 거룩하시고, 창조주가 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성도님들 모두가 시시껄렁한 것들을 쫓아가면서 인생을 거기에 쏟아붓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을 인생의 기초로 삼으십시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나라를 이루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세계를 즐거워하게 되는 복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면, 우리 영혼이 기쁨으로 뛰 놀면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내게 주신 식물을 마음껏 먹으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부부관계를 하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감사하면서 스포츠를 할 수도 있고, 음악을 할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축복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얘야, 다른 사람의 모양을 따라서 살려고 하지 마라. 너답게 살아라.” ‘너답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라, 하나님의 딸이니까 하나님의 딸답게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짝퉁 하나님에게 끌려가면서 종노릇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모든 선물을 즐거워하면서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내게 주신 이 모든 축복들에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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