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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신앙 (마 2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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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신앙 (마 24:4-14)

기독교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중세시대에 철학과 과학, 예술은 신학의 시녀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모든 것은 기독교 교리로 설명되어야 했고, 이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맞서는 것은 엄격하게 규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를 지나면서 이런 신중심주의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은 성서와 성인들의 삶을 주제로 한 종교화를 그리기보다 개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조각가들은 인간의 몸을 완전한 자연체로 생각하고 인간의 몸에서 미의 균형과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조각했습니다.

또한 이전까지 신과 종교가 중심이던 세상이 인간 중심의 세계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런 변화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르네상스라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셰익스피어(1564-1616)는 신화나 기독교 사상에 기대지 않은 채 인간 중심의 문학 작품을 쓴 최초의 작가이자 뛰어난 문장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인간이 중심인 세계관을 작품 속에 담아낸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중심이길 원했던 그 역시도 인간에게 있어서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 햄릿이라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신을 부정하고자 그리고 인간이 중심인 세계관을 만들고자 했지만, 그에게도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 햄릿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론 햄릿에서 이 글의 의미는 삶과 죽음마저도 인간의 선택이다라는 의미로 셰익스피어는 말하고자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설령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 셰익스피어 역시 인간의 죽음의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땅의 생명이 존재하는 피조물 가운데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또한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끝인지, 아니면 죽음 너머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그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결국 인간은 종교를 가진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딱 한가지 불변의 진리이 인간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죽음을 인간 스스로 피할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굳이 성경말씀을 근거로 들지 않아도 이것만큼은 불변의 진리이기에 모두가 동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도 맨 처음,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말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2장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창조된 인간이 왜 죽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바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동생을 죽인 가인도 죄의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인 자신도 자기가 지은 죄의 값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을 것을 겁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죽였을 때 그는 살인이라는 가장 끔찍한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당장 죽지는 않았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에도 오래 살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도시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이지만 죽음이 죄의 결과로 바로 나타난 가시적인 첫 번째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장을 읽어보면 가인에게 죽음의 벌이 내리기 전에 먼저 내려진 형벌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첫 번째 형벌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바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13-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죄를 지은 인간을 사로잡은 근원적인 형벌,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반드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죽을지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초기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개인적인 차원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질병, 사고 등과 같은 나 개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의 죽음, 내 가족의 죽음, 조금 더 나아가서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죽음을 곧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 개개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역과 시간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있는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우리는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문학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책들이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와 에스겔서과 같은 것이고 신약에는 요한계시록과 오늘의 본문이 들어있는 마태복음 24-25장의 내용이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묵시문학들은 왜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모든 것이 다 잘 되면,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는 죽어서 천국간다는 이야기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여기가 지금 너무 좋은데 딴 곳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너무 힘들면,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거나 핍박을 당하게 되면 차라리 빨리 하나님이 오셔서 박해자들을 없애버리고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져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묵시문학이 나타났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억압받고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착취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가 빨리 와서 세상이 끝나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들은 묻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 24:3)

마태복음 24장 3절의 말씀은 두 가지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말의 때가 언제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종말이 될 때 나타날 징조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이걸 묻는 것이겠습니까? 그 시간과 징조만 알면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종말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중말의 징조에 대해서만 대답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종말의 징조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징조가 가짜 메시아들의 출현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의 말씀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조국 대한민국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이며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자칭 하나님이 20여명 이상, 자칭 재림주가 50여명이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 이만희의 ‘신천지교회(신천지 예수교 장막성전)’와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신생아 이름 중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어떤 이름인지 아십니까? '메시아'라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 가운데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메시야', 이런 것들이 말해 주는 현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세대가 말세의 때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세의 징조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미국의 역사 불과 237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지난 68년 동안 미국이 개입한 전쟁만 해도 50여건 이상이 되며, 그 결과 희생자만 무려 300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2001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하루도 전쟁에서 쉬는 날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지금이 제3차 세계대전중이라고 말하는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족분쟁 등, 심각한 전쟁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세계 인구는 약 66억 중에서 8억이 굶주리고 있으며 하루에 10만명이 굶주림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5초에 한 명씩 기근으로 죽어간다고 합니다. 문제는 하루에 10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으며 또 5초에 한 명씩 어린이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죽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진은 또 어떻습니까? 요즘 지진이 하나 터졌다하면 대형사건입니다. 진도 6~6.9의 지진은 최대 반경 160㎞ 내의 건물들을 파괴하는 정도라고 하는데, 전세계에 걸쳐 최근 들어 1년에 평균 120건 정도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징조는 범세계적인 박해와 범세계적인 전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제자들도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 퍼져 나갔고, 그들에 의해 복음이 당시 세계의 끝, 스페인이나 영국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했던 미국이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해 옹호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가 되고, 공공장소에서 성경책을 들고 다는 것 조차도 불법이 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동성애자들이 고개를 들고 당당해진 시대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 그것이 곧 불법이 되어 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벌써 미국의 IRS에서는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세금조사를 암암리에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멸망의 징조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10-12절에 나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교회가 성장하면서 덩치는 커졌는데 서로 걸려 넘어지고, 서로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잘못된 복음으로, 헛된 진리로 홀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궁극적으로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게 되는데 그것이 종말이 가까웠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끝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외부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요인 즉 사랑의 소멸로 인해 올 것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는 곧 멸망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란 교리적으로 잘못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 자들이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수많은 신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말씀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구원받는 길을 말씀해 주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곧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참아내며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아픔을 주더라도,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도, 저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지만 함께 나누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길은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인류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넘어서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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