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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9>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여의도광장 개최 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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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5년 열렸던 전국복음화운동이 당시 박정희 정권에 위협이 됐던 것을 기억했다. 또 한·일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교회가 곧 박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 직후부터 준비하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유신정권에 대한 응전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준비위원회에 깊이 관여했다.

처음엔 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조촐하게 치르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반발했고 군사정권의 상징인 여의도 5·16광장을 장소로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서울에는 전도대회 선발대로 헨리 할리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 역시 놀랐다. 하지만 정작 그레이엄 목사는 여의도에서 세계 옥외 전도집회 역사상 가장 큰 대회를 치르자는 내 주장에 찬성했다.

나는 대회장인 한경직 목사와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었던 차일석 집사(여의도순복음교회), YMCA 전택부 총무, 상공부 장관을 지낸 김일환 장로 등과 함께 마포대교 북단에서 영등포쪽 입구까지 2.5㎞를 함께 걸었다. “이 광장에 서울 시민을 꽉 채웁시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 목사는 간단하게 “이 여의도가 복음의 섬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나는 할리에게 미국대사를 찾아가 여의도광장 사용 계획을 알리라고 말했다. 이어 국방부 유재흥 장관도 찾아갔다. 연합성가단 1만명이 올라갈 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병대를 동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연동교회 집사였다. 하지만 유 장관은 미8군사령관 승인이 없으면 군사용 철제빔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나는 결국 건설회사들을 대상으로 입찰에 부쳐 낙찰된 회사가 공사를 맡는 것으로 했다. 대회 강단과 성가대석, 강사실과 귀빈실 등은 정림건축 명예회장을 지낸 김정철 당시 후암교회 집사에게 부탁했다.

이런 계획을 밀어붙이자 유신정권에서 연락이 왔다. “나 육군참모총장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가대 계단석은 우리 공병대가 맡겠습니다.” “아니, 못하신다더니….” “각하의 명령입니다.”

그때까지 여의도광장엔 수도 시설이 없었다. 임시 수도를 100곳에 마련했지만 아스팔트 밖 모래밭은 날마다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혀야 했다. 나는 서울시의 모든 급수차를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시는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전도대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울 시민입니다. 그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급수차를 그들을 위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강하게 요구했고 서울시는 결국 매일 100대 이상의 급수차를 6일 동안 보내줬다.

광장엔 공중화장실도 없어서 100개 이상의 임시 화장실을 200m 간격으로 설치해야 했다. 변기는 빈 드럼통 500개를 구해 반쪽으로 잘라 화장실당 10개씩 묻었다. 기독 의사와 간호사 500명이 동원됐고 당시 서울시경은 일주일간 교통정리와 경비인력으로 연인원 1500명의 경찰을 편성했다. 대회 안내위원만 2000명, 결신자 상담위원 3000명도 훈련시켰다. 이렇게 전국의 교회가 단결해 거대한 기독교 축제를 준비했다.

전도대회 이야기를 모두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가 정권을 이기는 길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의 힘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종교의 무기는 신앙밖에 없고 우리의 힘은 성령의 권능밖에 없다. 73년 5월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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