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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의 힘만으로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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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설교제목 : 땅의 힘만으로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마가 11:12~13)】

 

<평범한 사람의 생각>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사람, 또 그래서 자연히 무식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험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 즉 평균치 이하의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가끔 교회에 나갔지만, 특히 성경을 펼쳐서 몇 줄 읽어보았지만 “뭔 소린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 평범하지도 못한 그 사람의 비판(기독교 비판, 성서비판)에 대해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평범하지도 못한 그이의 비판들에 대해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성서에 대해서 “당최 뭔 소린지 알수 없었다”는 그이의 비판은 기라성 같다는 그 어떤 신학자의 비평보다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 마음 가운데 꽂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 이야기>


예수의 일행이 베다니라는 마을을 지날 무렵입니다. 예수는 배가 고팠고,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다가섰습니다. 얼핏 볼 때, 그 나무는 잎이 무성해서 열매가 많이 달렸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일행이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아무런 열매도 없었습니다. 화가 난 예수는 나무에게 소리칩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저주의 외침입니다. 예수의 저주 때문인 듯, 마침내 이 무화가 나무는 그 이튿날 뿌리째 말라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마가 11:20~22)


이 성경의 이야기를 접한 그대의 소감은 어떠신지요? 은혜가 되십니까? … 글쎄요. 만약 그러하다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공부를 하고 연구를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한 사람은 이 이야기에 은혜를 받을지 모르지만, 평균도 되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당최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황당 이야기일 뿐입니다.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로>


성경의 한 구절을 선택해서 무조건 그 구절의 주인공인 사람(하느님, 예수, 바울, 예언자들 등등)을 구구절절 상찬(賞讚)하고, 이에 대비해서 우리네 생각과 마음을 무조건 깎아내리는 자기비하(自己卑下), 그것이 설교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식의 설교는 억지일 뿐입니다. 자기속임도 추가되지요. 우리는 '설교'를 반대하고 '이야기'를 찬성합니다. 이야기는 설교와 다릅니다. 이야기에는 칭찬도 있지만 비판도 있습니다. 또 이어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즉 칭찬과 비판의 변증법적 투쟁을 통해서 진리에 근접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보다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오늘 성경 이야기를 놓고, 비판과 칭찬을 함께 시도해 볼까 합니다.

 

<비판 둘, 칭찬 하나>


오늘 성경 이야기를 놓고 우리가 비판할 수 있는 대목은 두 가지 차원입니다.

첫째로 “예수는 속좁은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진짜 이런 속좁은 행태를 보이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자 그룹이 기록해 놓은 복음서의 내용 중에서 예수의 속좁은 언행은 분명 발견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배가 고파서 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다가 섰는데, 그 나무에 열매가 없으니까 말라 죽으라는 저주를 내린 이에 대해서 “속 좁다”는 비판이 잘못된 것일까요? 어쩌면 이 일화는 예수 개인의 속좁음보다는 예수와 그 일행들, 좀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성 자체가 너무 각박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에 대해서 구분할 때, 그 종교가 사막형 종교인가, 초원형 종교인가를 나누곤 했습니다. 생존환경이 각박했던 사막형 종교는 매사에 각박한 삶의 윤리를 권장하는 반면, 생존환경이 넉넉했던 초원형 종교는 모든 일에 관대한 삶의 윤리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어느 편일까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처럼 사막형입니다. 지나치게 사막형으로 편향된 현재적 기독교에게 초원형의 넉넉한 윤리를 수혈하는 것이 영성적 종교개혁의 방향성일 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만, 오늘의 성경기록에 등장하는 예수상은 너무 무섭습니다. 뭐랄까요? 진리의 빛이 찬연히 빛나서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냥 동네의 깡패를 만난 것처럼 천박하게 무섭습니다. 기억나시죠.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깡패 두목의 무서움. 부하들이 뭘 잘못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 성질이 삐뚤어져 있으니까 괜시리 사람을 두둘겨 패는 저질 깡패 두목의 모습. “예수한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식의 기록이 오늘 성경에 분명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글쎄요. 우리는 예수의 본래적 형상에 이런 저질스러운 차원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랄까요. 제자그룹의 예수에 대한 우상적 숭배, 바로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높이는 과정 속에서, 예수를 무서운 우상처럼 왜곡시킨 이스라엘 민족의 한심한 정신성의 기류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황당한 기록을 성경에서 빼버릴까요? 아니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황당한 우상적 놀음들을 걷어내면, 한 가지 빛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칭찬 하나의 이야기>


결론에 앞서서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최근 시골에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시는 분을 잠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여러 가지 유익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 이 순간 아름답게 기억나는 어록은 “유기농의 식물은 늦게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뭐를 심든지 간에 유기농으로 키우면, 즉 성장을 어거지로 촉진시키는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땅의 힘만으로” 자라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크기가 작고, 모양이 볼품이 없고 … 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무성한 잎들과는 대조적으로 초라한 외양으로 자라는 식물이 유기농 식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초라한 유기농 식물이 훨씬 맛이 있고, 향이 좋고, 건강하다는 점입니다. 그 양반 말씀을 옮기자면, “기가 막히게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속좁은 복수나 깡패식의 날카로움 따위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유기농업 식의 진실함, 화려한 잎들의 축제를 걷어내면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위선의 삶이 아니라, 그 반대의 삶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크기가 왜소하고, 볼품이 없지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들보다 건실한 아름다운 농부의 삶, 예수는 그점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땅의 힘만으로”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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