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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초의 그 한 사람이야기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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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그 한 사람이야기

눅10:30-35

 

  

소위 ‘강도만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들어 본 적이 있을 만큼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서부터 시작을 하죠(25-28). 즉 이 질문에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고, 이에 율법학자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되묻는 데서 이 비유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율법학자가 물어 본 질문은 분명 “누가 내 이웃입니까?”입니다. 그러면 ‘누구누구다’그러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누가 내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고 합니다. 비유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라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비유의 문맥인 율법학자의 질문과 비유 자체의 내용이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가 오늘날 누가복음에 위치한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이웃의 정의에 대한 질문은 아닙니다. 사실 이웃의 정의가 뭐냐? 하는 것은 관념적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도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당장 곤경에 빠져 도움을 바라고 있는 이웃을 회피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질문이 “내 이웃이 누구냐?”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거 논하다가 눈앞에 곤경을 당한 사람은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에게 더 어울리는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냐?”하는 질문보다 “누가 내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이 비유가 나오지 않지만,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싣고 있습니다(막12:28-34). 마가복음에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고 자신의 답변에 동의한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칭찬을 합니다. 율법학자의 이 질문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타나는 문맥과 동일한데, 같은 질문이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문맥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본래 누가복음의 문맥이 아닌데 누가가 편집 양태로 끼워 넣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이 비유는 구체적인 장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지역은 사막을 통과해야 하고, 강도들이 들끓는 곳으로 악명이 높은 지역입니다. 이 비유의 특이한 점은 이런 지역인 줄 누구나 다 아는 데도 혼자서 여행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나가기 어려운 곳에는 무리를 지어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혼자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아니, 강도를 만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겁니다. 강도들은 이 남자의 옷을 벗기고 두들겨 패서 반쯤 죽여 놓았습니다.

 

여기서 이 남자는 유대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 출신이었다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이야기할 때 따로 언급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경우에는 강도를 이렇게 심하게 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옷은 왜 벗기는 걸까요? 고대로 갈 수 록 옷은 신분을 의미합니다. 옷이 신분이죠. 신분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작자의 옷을 벗겼다는 것은 ‘너나 우리나 이제 같은 인간이다’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맞아서 죽은 것 같은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이에 곤경에 빠진 그의 곁을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맨 처음 지나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예식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은 자신이 제사장이므로, 죽어서 피를 흘린 사람을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그냥 지나갔을 겁니다. 율법에 충실한다면 말입니다. 아마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그냥 지나갔을 겁니다. 죽은 시체는 부정한 것이니까요(레21:11). 그러나 미쉬나와 탈무드에서는 여러 단계로 죽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시체가 버려진 것이라면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여하튼 제사장은 귀찮았습니다. 그런 경전의 세부규정이 있었지만 귀찮은 일이 분명하니까요. 성경에 나온 대로 반 쯤 죽어 있다면 당연히 돌봐야 합니다.

 

제사장은 다른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를 돕다가 그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신중한 생각과 판단이 그를 그냥 지나가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도 제사장의 행동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여기에는 당시에 제사장을 향한 반감이 들어 있을 겁니다. 제사장들이란 본래 그런 인간들이란 뭐,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건조하게 제사장의 행동만 보여줍니다.

 

레위인도 똑 같은 행동을 합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둘 다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레위인들은 성전 예배를 위해서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변명 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를 꺼내든 사람에게(화자)는 그 변명이 관심이 없습니다. 여하튼 종교 엘리트들인 이들, 누구보다 경전을 잘 알고, 하나님을 매일 매일 모시는 이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자, 이제 다음에는 어떤 인간군이 등장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성경 상식 말고 1세기 유대인 청중들의 입장에서 말이죠. 브랜던 스콧이라는 이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라면 ‘다음에는 평범한 유대인이 등장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 레위인, 유대인은 한 묶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부류가 질문의 본질에 어긋났다면 마지막으로 평범한 유대인이라도 ‘이웃이 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완전히 예측을 빗나간 인간이 나타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수 백 년 동안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사마리아인이 나타나자 ‘흥, 저 인간도 별수 있나. 앞의 점잖은 이들도 그냥 지나갔는데...’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편견은 빗나갔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한 행동은 이미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청중은 이 사마리아인의 행동에 놀랐을 겁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기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가졌다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스플랑크스(그리스어)’은 내장을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은 내장에서 감정이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에서 ‘애가 끊어진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도움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청중이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관계는 BC530년 이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갈등과 감정입니다. 예수의 시대에는 이 적대감이 더욱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 할 때도,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고자 했을 때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했다는 게 유대인들에게 쌓인 오래된 앙금이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시리아와 전쟁을 할 때 사마리아가 시리아를 도왔다는 것도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향해 적개심을 갖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기원전 128년에 그리심산 위에 있던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불태운 원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인간이 아니었고 사마리아인에게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갈등과 반목과 증오가 5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인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분쟁에는 그럴만한 쌍방 간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미워해야 할 정당한, 역사적이고도, 윤리적인 이유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배경으로 움직이지 않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인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으로만 관계합니다. 이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차라리 원수의 도움을 받느니 혀를 깨물고 죽겠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유대인도 수 백 년이나 저장된 그 처절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의 도움 앞에 온전히 자신을 맡깁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보살펴 주었다는(동정심을 품고)것은 대부분의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유대인들이 지닌 사마리아인에 대한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교훈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강도만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운 것이 아닙니다.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오래된 역사적인 갈등의 한 당사자들입니다. 수 백 년 원수지간의 당사자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선행이 그 오랜 증오와 분리의 벽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아마도 청중은 자신을 이야기 속 등장인물 가운데 누군가와 동일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어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처음에 권세 있는 이들이 지나가는데 그럴만한 이유로 그냥 지나갑니다. 청중은 여기까지 듣다가 그러면 다음에는 우리 같은 보통 유대인이 나타나서 저 강도만난 유대인을 돕겠지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역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큰 자랑스러운 일을 할 거여 하고 동일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단, 마지막으로 선행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들과 같은 보통 유대인 남자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중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순간 청중들은 당혹했을 겁니다. 청중만이 아니라 강도만난 이 사람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중이나 강도만난 본인은 두 가지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거부하고 곤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든지 말이죠. 그러나 강도만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마음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유대인과 사마리안 사이의 증오와 갈등의 벽을 허무는 첫걸음을 내 딛었습니다. 낡은 통념의 벽을 넘어섰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수 백 년의 갈등당사자들을 대전환의 기로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단순히 팍하게 이웃을 도운 도덕적 선행으로 결말 날 일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화해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에서 느끼는 도덕적 인간의 자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문제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와 ‘그들’사이에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 계급으로 분리하는 벽이 존재하지 않고, 원수인 그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돕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단순하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상하게 보살피라는 윤리적 교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집단과 집단 사이의 화해에 대한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게 경계선을 넘는 것은 곤경에 빠진 한 유대인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최초의 사마리아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비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화해의 우정을 향한 최초의 한 사람으로 살아서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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