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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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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거짓된 신앙은 진리이치와 신적인 도덕이치와 하나님의 생명이치의 깨달음이 되거나 인격화 성품화 되는 진리지식과 지혜는 성령의 충만적 역사인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거짓된 신앙은. 무슨 신비적 신체적 체험에서 성령충만을 찾으려고 하고 있으니 자기 자신이 귀신들린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성령을 받았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또 나타나게 돼 있는데 성령의 열매는 한 마디로 신적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성품이 어찌 진리이치나 도덕이치나 생명이치의 깨달음이 없이 맺혀지겠느냐 그 말이요. 그런 교훈 그런 정신 사상 없이 어떻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 정확한 뜻도 모르고 어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겠느냐?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그 이상 없는 모든 시험의 종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세 가지 시험 속에는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의 모든 시험이 다 들어있는 정신 사상들이고 소원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성령이 충만이 되었느냐? 표면적으로 보면 광야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지요. , 표면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할 수밖에 없는 출생에서부터 삼십 세 즉 삼십 년까지의 성령이 임할 수밖에 없는 삼십 세까지의 그 준비 마음상태 정신상태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부모의 신앙교육이라든지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그런 것을 많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 어머니 또 아버지 교육이 없이 이를테면 술집여자 같은 그런 가정에서 예수 같은 그런 사상이 나오겠느냐? 그건 안 나온다. 한 가정에서 자란다는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교육이 들어있다. 그거 무시하지 마라. 오늘날 기독교에서 모든 가정의 교육이 그걸 무시하고 있어. ‘집이 좋다. 튼튼하다할 때는 이미 그 속에 그 요소가 다 들어 있잖아요. 왜 그걸 무시해. 눈에 안 보인다고 그걸 무시해? 기도로만 어떻게 해 주십시오그러면 그걸 들어줘요? 마귀가 얼른 듣고 온다.

 

그런데 3:38에 인간들의 족보 맨 위에 하나님이 나오고,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인간들이 보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인간들의 족보 맨 위에 하나님을 만났구나. , 족보로만 보지 말고 우리가 족보를 보면서 이 역사를 하시는 이 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과정적인 그런 면을 가만 보라고요.

 

4:1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충만으로 요단강에서 돌아오신 겁니다. 성령충만으로 요단강에서 돌아왔어. 이것을 연결시켜 보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세례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직통이었구나. 하나님과 직통.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리는 먼저 첫째로 광야로 향하고, 광야로 향하려면 도시와 성읍을 등지게 되는 거지요. 그 신앙정신 사상이요.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신앙사상적으로는 광야교회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광야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지도 인도밖에 없어요. 그 가운데서 자녀교육하고 여러 가지 몰아오는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하는 그 이상은 없다.

 

먼저 광야로 향하고 그게 첫째고, 둘째는 광야로 나가야 선지자 만나고. 광야로 나가야 선지자 만납니다. 광야사상은 반드시 진리이치의 종을 만나게 돼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도대체 나를 인간으로 만든 목적이 뭐냐?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먹고 마시고 고작 해봐야 뭐 평화롭게 행복하게 산다는 거 얼마 안 되는데 인간에 대해서 뭔지 알아야 되겠다하는 이런 거라든지.

 

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워낙 신문지상이나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이거 참 일반 이치적으로도 볼 때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더 들어가서 저런 거는 아닐 텐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에게 그 정신 사상은 광야로 광야로 나가고 있는 상태다. 그게.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게 돼 있다. 선지자 만나면 세례를 또 받게 돼 있어요. 세례는 어디서 받느냐? 요단강 근처 광야에서 받는구나. 애굽정신 사상에서 헤롯정신 사상에서. 왕궁에서 세례를 받는 게 아니고 그 정신 사상을 가진 자에게 세례를 주는 건 아니다 그 말이요. 그래도 내일은 어떻게 될 값에, 아닌 말로 내일 하나님을 떠난다 하더라도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살고자 하는 어떤 현실에서의 각오 결심 그 정신 사상에 선지자는 세례를 준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려면 광야로 나가야 하고. 선지자는 광야에 살아요. 참 선지자는 그래요. 거짓 선지자는 궁궐에서 살아요. 돈 속에서 살고 세상 속에서 살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그래요. 그걸 알아야 된다. 기독자라면 그런 정신을 가지고도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고 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아가면 현실이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거 얼마 못 간다.

 

세 번째는 세례를 받고 메시야를 만나게 돼 있습니다. 교훈 받고 훈련 연단 받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열매의 거룩한 사람이 되는구나.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겠다는 결심 각오를 하면 동시에 성령의 감화 감동이 크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다 그 말이요.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커.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그게 무슨 감동?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라야 그런 게 있는 거지 악령의 감화 감동은 그런 게 없는 거요. 이 성령의 감화 감동이 되어 하는 그 상태 신체적 어떤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적인 면에서 인격과 성품 사상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옳음을 행하고자 하는 그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세례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받아야 되는데 당신이 왜 나에게 받으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그러지요? ‘하나님의 의를.’ 바로 그거라. 그런데 우리는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의를 생각했나요? 몰라서 못했다. 이제는 늦지 않으니까. 요단강에서 돌아오신 후, 요단강은 약속의 땅을 건너가는 경계선이다. 구약성경으로 돌려봐요. 즉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죽음의 선을 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자는 모두 영생권 안으로 생명권 안으로 이전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돌아오신다는 것은 중차대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에 대한 구원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책임이 있으니까 요단강에서 돌아온단 말이요. 생각을 해봐요. 돌아와서 이제 시험을 받는 거지요. 죄가 있어 시험을 받는 게 아니라 성도들을 자기를 건져내려니까. 그게 들어있고.

 

두 번째는 네가 예수 믿었느냐? 이제 어떤 시험을 받더라도 어떤 종목의 시험을 받더라도 나처럼 이겨라이게 들어있어.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성령 충만하신 분이 성령에게 이끌리신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성령이 몇 명이죠? 안에 있는 성령이 있고 밖에 있는 성령이 있고 지금 말이 꼭 그 말 같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성령은 몇 분이요? 방언하는 성령이 있고 안수하는 성령이 있고 입신해서 보여주는 성령이 있고 귀에 뭐 소리로 들려주는 성령이 있고 꿈을 꾸게 하는 성령이 있고, 아마 대 여섯 분은 되는 거 같은데. 아무리 못 되어도. 그래요? 성령은 한 분이세요.

 

몸 안의 성령이 따로 있고 몸 밖의 성령이 따로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화 하나님의 의로운 인격화 하나님의 의로운 실상화 된 그 거룩한 성품은 성령 하나님과 무엇이든지 간에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그게 쉽게 알아지겠나? 즉 무슨 말인고 하니 만 있지 아니오가 없다는 말이요. ‘만 있지 아니오가 없다. 사실 우리도 그래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 편에서 말을 그대로 듣다보면 내 안의 성령 밖의 성령, 꼭 형님 동생이 손잡고 가는듯한데 그런 게 아니다. 내 안에 내재된 그 성령, 몸 밖의 성령이란 그 말의 의미는.

 

이끌리사하는 건 안 가려고 하는 걸 끌고 가는 게 아니고 대립 마찰 충돌이 없다고 하는 면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시는구나. 어떻게 이해 가는지 모르겠네. 우리 일반적으로 이런 게 있습니까? 저 멀리서 자기를 부르는 것과 기다리고 있는 것과 자기 속에서 가고자 하는 것과 그것은 하나입니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성이 하나냐고요? 둘입니까? ‘안 가려고 하는데 뭐 자꾸 오라고 그러냐? 에이 귀찮은데그런 겁니까?

 

애인 만날 때에 즐거워서 뛰어가다시피 마음이 먼저 가서 있습니까? 연애들 안 걸어봤나? 마음이 먼저 가서 있어. 그렇지 않아요? 마음이 벌써 가서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둘이냐? 그건 아니란 말이요. 안에서 작용되는 거와 같단 말이요. 말하자면 둘이라는 말이 아니고 여기는 마찰과 대립이 없구나. 그런 것을 느끼게 하려니까 이런 표현을 들고 나온단 말이요. 참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해놨나? 맞다. 잠자는 사람 못 깨닫게 하려고.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첫째로 아담은 먹고 시험입니다. 생명과 일반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 두 번째는 예수님은 사십 일을 굶고 시험입니다. 말하자면 어느 시험이 더 어렵겠습니까? 먹고 하는 게 어렵겠어요 굶고 하는 게 어렵겠어요? 굶고 하는 게 어려워요? 어그러지고 패역 된 신앙의 성질들을 우리는 연상을 하면서 세례 받은 후 신나게 일을 해 보거라그게 아니고 마귀에게로 데려가서 광야에서 시험을 쳐야 한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기분이 나빠가지고 나 밥 안 먹겠다하고 굶어버렸습니까?

 

굶으니까 배가 고프니까 마귀가 가만 보고 있다가 예수가 얼마나 배가 고프랴? 먹여서 마음을 풀어드려야 되겠다하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니 나 안 한다.’ 아버지께 단단히 마음이 오그라져 있어서 나 돌로 떡 안 해 먹는다그 말이지요? 제 말 알아듣고 있어요? 먹여놓고 마귀에게 시험 한 번 쳐봐라이러면 기분이 좋아서 하겠는데 굶겨놓고 사십 일을 굶겨놓고 시험을 치니까.

 

, 우리 마음 같으면 예수님이 나 밥 안 먹으련다하니 마귀가 옆에서 가만 쳐다보고 있다가 저 토라진 마음을 내가 위로해 드려야 되겠다.’ 마귀가. 그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나 네 말대로 안 한다한 그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굶겨놓은 그 마음이 안 풀려서 그 마음이 오그라져 가지고 나 돌로 떡을 안 만들어 먹는다그 말이지요? 그 말 아니요? 마귀는 옆에서 어떻게 하면 저 오그라진 마음을 풀어드릴까하고 신경을 쓰다가 보니 신경을 쓰다 보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그럼 기분이 확 달라지겠지? 마귀의 수작은. 높은 산으로 데려 올라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바람도 좀 쐬어주고.

 

높은 산에 올라가면 바람이 많이 불거든요. 광야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로 데리고 올라가면 기분이 확 트이지요. 아주 정신이 맑게. 바람도 쐬어주고 또 성전꼭대기에 세워서 영웅적으로 뛰어내려라.’ 그렇게 저렇게 살살 달래보았지만은 끝끝내 밥 안 먹는다고 해서 마귀는 졌고 예수님은 이긴 거지요? 그런 식으로 이긴 거지요? 맞아요 틀려요? 틀려요? 대답을 얼른 얼른 좀 해요. 틀려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 동기 목적을 모르고 시험을 받으실까? 모르고 시험 받겠어요? 그리고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그 마귀의 수단 방법을 모르고 시험을 받겠느냐 그 말이요. 이 성경을 가만 보면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이 가르쳐줬는데 우리는 성경을 놓고도 뜻을 몰라서 여전히 펑펑 자빠지고 오히려 더 마귀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마귀입장에 서서 마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여지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시험을 받겠느냐 그 말이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아담 넘어진 그거 모를까요? 훤하게 다 알고 있어. 우리는 이미 기록된 그 성경을 보고 알고 있느냐 그 말이요? 모르고 있어. 계시도 모르고 정신도 모르면서 문자적으로도 어그러뜨리고 있으니 이게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이게 예수 믿는 거냐? 이게 교인이냐? 이게 성도냐? 이중 삼중으로 이건 너무나도 저질이고.

 

생명과는 뭐냐? 사람 자체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사람 자체에게 주는 교훈이 생명과요. 생명과가 무슨 저기 부평의 누구? 복숭아가 생명과다? 선악과다? 교인들은 못 먹게 하고 자기는 먹고 팔아먹고. 그 참 그런 발상들이 참말로. 그럼 천도복숭아는 하늘에서 열리는 복숭아지요? 어찌 그리 사람이 어리석은지? 생명과는 뭐라고요? 사람 자체에게 주는 교훈이 생명과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게 생명과다. 이게 신조척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척도 저울 기준 표준. 그걸 가지고 다는 것. 인조척도가 아니고 신조척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준이요. 모든 면에 기준이요. 그렇게 사는 거.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나 모든 생활의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나 평가성이나 전부는 그 분이 기준이요. 그것은 전부 생명이요 영생이요 하나님처럼 온전으로 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먹어라. 이게 생명과요.

 

선악과는 뭐냐? 인간 네 눈으로 보는 기준. 인간 네 기준. 어떤 기준. 오각과 오감성을 가지고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 기준을 삼고. 그럼 거기에는 자기 인간경험도 있고 다 들어있는 거요. 기준으로 삼고, 그리고 그 소원 목적으로 그 정신을 먹고 그 마음을 가지고. ‘소유적으로 많이 가져라그게 무슨 과? 선악과. 큰 게 얼마나 보기 좋아요? 색깔 아름다운 거 얼마나 보기 좋아요. 말하자면 큰 거 얼마나 보기 좋아요? 전부 세상사람들이 가지고자 하는 그런 성질적 요소는 전부 가견적이요 물질적인 거, 세상에 속한 것으로 다 들어있는 그 정신으로 영글어지는 것. 그 교훈을 먹이는 것. 그 가르침을 먹이는 것. 이건 선악과다. 그 기준을 먹으면 넌 죽는다. 영이 죽고 신앙이 자라는 면에서 쪼그랑망탱이가 돼버리는 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로 너는 끝나는 거다.

 

이게 성경이다. 하나님 말씀이다. 이게.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잘 판단 평가해서 선악과는 그걸 가져라 그 말이요. 땅에서 경험하고 네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그거 다 기준에서 네가 가져라. 선악과요. 우리는 그게 목적적이 아니고 이용물이다. 방편으로 사람 만들어지는 면으로 쓰는 방편이다. 그런 건 전부 다 세상은 전부 다 방편이다. 하늘의 것을 위한 방편이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전부 불에 타지고 없어질 물질들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온전으로 진리본질화 시키지 않는 신앙은 전부는 선악과 먹는 신앙이라고 보면 돼요.

 

지금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속성적으로 성품적으로 자체화 되는 진리본질의 신앙사상의 교훈이 있는 겁니다. 세상 불타기 전에 부지런히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라. 마귀시험은 영적으로도 있고 육적으로도 다 들어있어요. 육적으로는 자극제로 쓰는 거고 격동제로 쓰고 있어요. 이놈의 마귀가. 마음을 넘어뜨리려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와서 자극을 줘서 마음을 사람을 넘어뜨리는 거요. 이해가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은 환경적 조건과 신체적 조건 정신적 조건은 최하의 악조건입니다. 사십 일 동안 금식했다면. 신체적으로도 악조건 환경적으로도 광야니까 환경적으로도 악조건. 정신은 그 한 번 생각해봐요. 보통 사람은 희멀건 해서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인간이 그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거기에 도달됐다. 그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인간으로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말하자면 이 상태에서 인간이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그 정신적 신체적 환경적 악조건 상태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자격도 보여줘야 된다. 놀랍잖아요? 그 생각을 해봐요. 생각을.

 

예수님께서 내가 며칠 동안 굶을 수 있을까하는 자기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힘든 시험이다. 우리로서는 타락된 우리로서는 예수 믿어도 타락의 요소가 성격 성질이 들어있는 우리로서는 이건 꿈도 못 꿀 일이다. 한 번 생각해봐요. 이런 걸 가만히 생각을 하면 정말 그 예수님의 정신 사상 그 마음 그 양심 그 뜨거움에 정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놀랍다.

 

3-4: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시험은 다방면으로 오는구나.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자극을 주고 시험을 합니다. 물질가지고 시험을 자극을 주고 가르치는 것으로 시험주고 자극주고 활동으로 유혹으로 미혹으로 대립과 마찰과 충돌로 호응하는 척 하면서 오각과 오감성으로 영적 육적으로 종교성으로 여러 가지 각도로 오는구나. 일반적으로도 오고 이게 뭐 종교적으로도 오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이건 뭐 다방면의 각도로 오는구나.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다르고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점심 때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르고 남녀노소에 따라 다르고, 부요하면 부요한대로 시험이 있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시험이 오고.

 

그러니까 마귀의 시험에 이기려면 반드시 진리의 지혜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안 된다. 모르고는 이길 묘책이 없다. 감정과 흥분과 믿사오니배짱가지고 못 이긴다. 속지 마라. 벌써 세상에 놓여졌다면 이것이 자기 몸 주위에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게 자칫하면 시험이 되는 거고. 그걸 알아야 돼. 영적인 면에 지혜가 있으면 다른 사람은 넘어간 상태지만 자기는 늘 이기고 들어간다. 그런 세상이다. 자기가 숨 안 쉬는 사람은 죽는 거다. 숨 쉬는 사람은 살아요. 맞잖아요? 우리는 성경 깨닫는 면에서 복 복하지 말고 자기 좋도록만 구하지 말고 대국적인 큰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크게 보고. 신앙이 그래야 된다. 좁게 잘잘하게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진리의 지혜지식이 있어야 한다. 모르고는 이길 재간은 없다. ‘믿사오니, 믿어놓았사오니배짱가지고 이길 수 없다. ‘사십 일 금식기도 했다네. 팔십 일 금식기도 했다네로 못 이긴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말씀 깨달음으로 들어가야지. 가령 굶는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사십 일 금식 했어요. 인간 중에 팔십 일 했다면 그건 예수님보다 훨씬 위입니까? 금식으로만 말하자면 훨씬 위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80일 금식한 자기에게 와가지고 아이고, 형님 못 알아봤습니다그래야지. 참 그런 저런 소리 가만 들어보면 이게 지금 미쳐있구나. 옳은 정신이 아니란 말이요. 하나님의 온전에 딱 올라서는 거 그 이상 없다.

 

그러니까 이 뭐 금식기도 할수록 4080120일 할수록 마귀가 보여주는 환상열차 타는 거요. 이제. 그럼 거기서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이런 짓이 나오는 거요. 간증하러 다니느라고 그런 짓이 나온다. 그런 사람들은 마귀가 보여준 환상열차 탄 것이 틀림없다. 그거 마귀간증 악령간증이지. 그건 진리이치의 깨달음은 없는 겁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보여주는데 한강 같은 저 큰 강 건너에서 누가 자꾸 오라 그래서 못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손오공 같이 귓속에서 뭘 뽑아서 훅 부니까 다리가 착 놔지는데. 허허. ‘이 참 들어가서 보니 누구는 금 집 누구는 은 집 누구는 나무집 누구는 지푸라기집인데 이름이 써 있더라.’ 깨어나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집사님들은 내 이름이 있더냐. 허허허. 아이고, 참말로 이게 그 목사님 그런 상태를 또 무슨 큰 것인 양. 그게 악령의 짓들인데.

 

문제는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나? 그것도 집회 후에 그런 일이. 참 그러니 저도 이러고 있지만 목사님들이 바로 못 가르치면 그런데 다 빠진다. 미쳐버리고 가정 풍비박산 돼버리고. 그래서 보면 정말 깨진 가정이 많고 자녀들은 제 멋대로 정말 많고 교회가 이게 무당집으로 된 교회가 많고요. 정말 제 입장에서 보면 똑바로 된 데가 드물다. 정말 드물다. 다 그럴까마는 거의가 비슷한 상태로 막 들어가 있어요. 순복음이니 장로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이건 옛날에는 교리 같은 그런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잘못된 거지만 사실은 오늘날 이건 다 막 섞여버렸어요. 혼탁 혼합이고. 솔직히 말해서 진리이치의 성도는 참 보기가 힘들다.

 

참 우리는 긍지를 가집니다만 교훈만이 아니고 실제생활로 들어가서 적용이 잘되어 들어가고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들이 적용이 잘 돼 들어가고. 여기에는 사람의 정서적인 교육과 자기의 인품이 다듬어지는 그게 다 들어있단 말이요. 그래서 하라그러는 거고 하지 마라그러는 거고. 그게 다 들어있어요. 생기기는 이렇게 생겼지만 우리 교인들의 영원 궁극적인 존귀영광의 실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란 말이요. 그리고 그런 역사적인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아왔고 앞으로도 볼 거요. 내가 죽기 전에. 진리는 받고 사람이 다듬어지지 못하면 참말로 이건 고슴도치로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먼저 깨달아지면 먼저 자기를 살펴라. 먼저 자기를 살펴라. 그 속에서 먼저. 그래야 다른 사람 눈에 부분적인 면에서 자기가 바로 됐으면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뽑을 수 있다. 지적도 할 수 있고. 이해가십니까?

 

우리 신앙 믿음은 실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삶으로 들어가 있어요. 신앙 믿음이 실질의 삶이 아니면 구원은 이뤄지지 않는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학교학생 같으면 학교에서 똑바로 배우지 못하면 너는 멍텅구리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으면 똑바로 배워야지. 깨닫는 수준이 올라가고. 평신도라도 빨리 올라가는 그런 성도가 있는가 하면 집사직분을 가지고도 이게 집사인지 이게 평신도인지 이게 안 믿는 사람인지? 그래서는 안 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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