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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롬 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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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롬 7:1-12)

사순절의 넷 째 주일을 보내는 이 시간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 주님의 귀한 보혈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7장을 강해하게 됩니다.
많은 신약의 주석가들이 참으로 강해하기를 주저하던 본문이 드디어 우리에게도 도착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로마서의 5,6,7장의 고비를 넘어야 8장의 은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선언한 기독교 교리의 백미가 바로 5,6,7장인데 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만만치 않은 본문이 7장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강해했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에게 준비된 강해 설교를 선포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도 성령의 철저하신 도우심을 강단에서 기도하며 설교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생각지 못했던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고들이 이 시간 우리들의 심령을 울리고 전율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할 때는 세 번을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만큼 결혼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임을 시사 하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용모도 단정하고 아주 단아해서 모든 신학교 남학생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될 만큼 주목을 받던 자매였습니다.
졸업 후 사역을 나온 뒤에 그 자매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른 바 사기결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결혼 실패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실례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에게 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어떤 결정적인 문제가 발견되면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이루기 전에 기도를 세 번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어떤 C 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미혼의 때에 L이라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통해서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혼을 해서 보니 L 이라는 남편은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해 나아가는 데 빈틈이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빈틈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나아갔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이런 남편이 존경스러웠고 참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내 남편을 자랑했고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참 대단한 것처럼 보였던 L 이라는 남편이 결혼생활을 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워져 갔습니다.
집에서 법대로 규정을 해 놓은 가훈을 강요하는 남편이 힘이 들어졌고 C라는 아내는 잘하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욱 자신의 초라함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남편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였고 불면증에도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에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말 그대로 우울증에 빠져 괴로운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과부가 된 것에 대한 외로움이 있어서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C 라는 이 여인을 이해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J 라는 남자였습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다시 이 여인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J 라는 남자는 불의에 사고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보너스로 사는 복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 남자는 매사에 이해심이 많았고 아내가 실수를 하면 너그럽게 용서도 해주면서 항상 사랑의 마음을 갖고 아내를 대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재혼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 여인은 잃었던 자신감도 다시 찾았고 우울증, 불면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경험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비유는 본문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L이라는 첫 번째 남편은 LAW(율법) 상징이고, C라는 여인은 크리스천이라는 바로 나를 상징하고, J 라는 새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 (JESUS)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저는 이상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 교우들에게 본문 로마서 7장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은 율법이라는 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으로 인하여 옴짝달싹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율법에 매여 자유롭지 못한 어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통하여 깨닫게 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율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은혜라는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 본문 2-3절의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4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 로마서 10:4절과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래서 우리가 지난 6장을 강해를 통하여 살펴 본 6:14절 말씀의 가장 성서적인 강해가 되는 것입니다.

롬 6:14절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인하여 자유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은혜 아래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유하게 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우리들이 도전 받아야 하는 은혜입니다.

1.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4-5절을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율법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굴레에서 허덕이게 만드는 죄의 열매를 맺게 하였지만 율법에 대하여 죽음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이제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천명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주인공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권면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MBC의 100분 토론에서 성직자와 교회의 세금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느낀 단상을 이야기 안 할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드리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그 날 종교인 법인법 제정추진위원회 공동 대표로 있는 고은광은씨를 비롯한 성직자의 세금 납부에 대한 찬성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또 반대에 있는 사람들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에 세상적인 안목의 상징으로 앉아 있었던 고은광순씨가 한국교회의 부패의 결정적인 단서가 십일조에 있다고 못 박고 이러한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강요하는 일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근거로 마태복음 23:23절의 말씀을 본인이 직접 말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십일조의 이야기를 한국교회는 강요하고 있다고 강하게 언급했습니다.

마 23: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왜 십일조는 강조하면서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강조하지 않는다는 식의 공격이었습니다.

이어 교회개혁실천연대의 대표로 있는 박득훈목사의 주장에서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축복하셔서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단순논리로 신자들을 속이지 말라고 말하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 날 인터넷을 통하여 이 발언들을 들으면서 타들어가는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좋은 말을 할 때 십일조를 바치라는 목사의 협박(?) 때문에 그 동안 십일조를 드렸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어떻게요?
십일조를 헛 드린 것이니 십일조를 드리지 마십시오.

십일조는 성경에 없는 것인데 교회가 살림에 궁색하여 신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드리라고 한 것이라면 여러분 뿐 아니라 저 역시 고등사기꾼에 집단적으로 최면에 걸려 물질을 탕진한 것이니 조금 억울하기는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 차리고 십일조를 드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목사의 거룩한 성직을 걸고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한 것은 교회를 배부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그 십일조가 우리들에게 떼 부자가 되게 만드는 요술방망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드린 것입니다.

절대로 궁색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면서 거리의 무슨 야바위꾼처럼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도(십일조) 하고 저것도(정의와 긍휼과 믿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했기에 십일조를 전한 것입니다.

② 첫 번째 이유보다 사실은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부분에 거의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사역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린 것은 주님의 말씀이며 명령이기 때문에도 드렸지만 더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은 내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말 할 수 없는 감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 싶어 드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드렸습니까?

내가 하나님께서 받은 것은 물질로 절대 계산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다 드려도 절대로 아깝지 않은 우리들임에도 하나님은 또 나를 생각하셔서 모든 것을 다 드려라 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아멘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10개 중의 하나만 나의 것으로 드리고 나머지 9개는 내가 너희들에게 위탁한다는 그런 또 다른 황송함의 은혜가 십일조라고 생각해서 이제껏 그 은혜에 감사하며 십일조를 드린 것이지 그것이 무당이 비는 복채이기 때문에 드린 것이 아닙니다.

100분 토론에서 그 날 개혁론자인 박득훈목사의 말대로 십일조는 해석의 문제라는 것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며 헌금을 사회에서 바라보는 잣대대로 부적과도 같은 도구로 드리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 몸, 헌신의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의 행위로 표현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 얽매여 있던 나를 예수님의 복음의 은혜로 자유하게 하신 은혜를 맛본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서 그래서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다시 한 번 4절을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하게 된 우리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을 위하는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이 악한 것이며, 그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의 칼럼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 양복 입은 무당

무당이 굿을 합니다.
신명나게 한판 노네요.
걸쭉한 목소리로 호령합니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정성이 부족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연신 돼지머리에 퍼런 돈다발을 안깁니다.
그러고는 손바닥이 아려올 때까지 열심히 빕니다.
무당은 자기에게 강림한 신의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사람들은 더욱 신기해합니다.
행여 신이 땡강이라도 부릴까봐 돼지머리에 정성을 더하고, 이제 허리까지 요동을 치며 빕니다.
다른 소리에 잡생각이 들까봐 소리를 크게 내어 기도를 올립니다.
무당은 열이 올랐습니다.

무당은 이 시점에서 맹한 구복자(求福者)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날이 시퍼런 작두를 펼칩니다.
그 작두날 위에 머리카락을 한 올을 올려봅니다.
머리카락은 서늘하게 두 동강 나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주눅 듭니다.
그때 무당은 맨발로 그 작두 위를 걷습니다.
심지어 그 날 선 작두 위에서 덩실덩실 춤도 춥니다.

이제 그곳에 모인 불쌍한 중생들은 그 작두 위에 선 무당과 그 위에 강림했다는 귀신에게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위해서 무당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앞 강단에 어떤 이가 섰습니다.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외칩니다.
때때로 노래도 불러줍니다.
우스갯소리로 웃겨주기도 합니다.
신명나게 한판 놉니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복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협박합니다.
'헌금이, 봉사가, 기도가 부족하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헌금을 합니다.
자기가 헌금한 만큼 몇 배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그 강대상에 선무당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떨어질 복에 관해서만 기도를 합니다.
다른 잡생각이 들까봐 큰소리를 내어 자신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도록 기도합니다.
행여 다른 이보다 목소리가 작으면 정성이 부족하다고 신이 노하실까봐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당이 작두를 타듯 강대상 앞에 또 다른 무당은 가끔씩 사람들을 쓰러뜨려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게도 합니다.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꿀 수 있다고 너스레도 떱니다.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모든 소원을 이루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외칩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추임새를 넣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 강대상 앞에 또 다른 무당에게 자신들의 정신을 빼앗깁니다.
거기에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예수는 복만 내려주면 되는 그런 예수입니다.
자신들에게 복만 내려준다면 예수여도 좋고 몽달귀신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추악한 죄 덩어리인지 전혀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서운 지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 세상의 복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예배당 안에서의 굿판은 오늘도 여기저기서 신명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기에 교회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인 이유는 성도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기에 성도인 것입니다.

목사가 왜 목사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도록 목숨 걸고 사역하기에 목사인 것입니다.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치열한 공중권세를 잡은 자와 영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의 은혜로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조금은 어렵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해석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율법으로 살 때에는 율법에 묶여 살아서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영적으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자유하게 되는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이후에 살아야 하는 방법이 그래서 새롭게 대두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본문 6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천명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섬긴다’는 헬라어 단어의 원어는 ‘ douleuw’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 doulo"’라는 ‘종’ 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섬긴다는 뜻의 ‘둘레오’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종이 되어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6절의 의미는 ‘성령의 종이 된다’는 뚯입니다.
성령의 종이 되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율법의 묵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조명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제 방에 2월 달력이 어제 띠어졌습니다.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2월의 달력에 삽화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광야로 이끌림을 당하는 그림이었습니다.
화가는 하늘에서 빛과 같은 광채를 예수님의 머리에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그림 위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
홍라희씨가 비싼 돈을 주소 샀다는 ‘행복한 눈물’이 왜 행복한 눈물인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어려움 사람들의 고통이 담겨져 있는 불행한 눈물처럼만 보이니 말입니다.
그림에 대하여 문외한입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2월의 달력에 그려진 삽화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주님의 모습은 은혜가 되었고 그림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의지하는 삶은 불완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왜 완전하지 않습니까?
한 꺼 번에 대답합니다.
율법은 죄를 진단하게 하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죄를 용서해 주는 그래서 치료하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진단하고 치료할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지 죄만 진단하는 것으로 그칠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구원에 관한한 아주 냉정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붙들고 그 율법이 구원의 포기할 수 없는 조건 인양 성도들을 현혹하며 농락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쐐기를 박으며 선포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에 있습니다.

갈 2: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어지는 갈 2:20-21절은 바울의 믿음과 율법에 대한 정의의 백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러면 율법은 무용지물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거룩하며 선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들의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도구이기에 거룩한 것이며 우리들이 영적인 삶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 양산의 감림산 기도원의 구국제단으로 산 기도를 하려 간 적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기에 구국제단이 차려져 있는 산위에는 흑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흑암을 깨뜨리며 나침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있습니다.
휴대폰의 액정화면이었습니다.

지금은 휴대폰이 많이 upgrade 가 되어서 이제는 랜턴의 역할까지 하는 기능이 있지만 당시에는 액정화면이 환하게 비쳐주는 역할을 해서 기도를 마치고 산 위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휴대폰의 액정화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랜턴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부자청년의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나섰을 때 한 사람이 달려 나와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후에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막 10:18-1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참 주목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영생의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 준수였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했습니까?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주님의 역설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주의 계명에 대한 신실한 준행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율법의 준수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을 준수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요 16:13절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목하십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정답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는 율법을 준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우리 신앙생활 하는 자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 듯해도 성령의 내주함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의 냄새가 납니다.
아무리 신앙의 연륜이 많아도 성령의 내주함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그는 자연인입니다.
아무리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도 성령의 내주함을 통한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왜 요즈음에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많습니까?
교회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사역하지 않고 사람의 의해서 이끌림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왜 요즈음에 신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들은 풍월로 종교생활은 하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신앙생활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이번 주에는 성령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또 주실 지 흥분되고 기대됩니다.’

또 한 분이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계획을 갖고 이번에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조명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손을 쓸 수가 없단다.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과감하게 포기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름이 끼치는 감격의 전율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샘나지 않습니까?
옛날에 샘이 많은 자가 공부를 잘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영적인 샘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교우들이 성령님에게 철저하게 이끌림 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행함에도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교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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