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으라 (요 19:1-4)

  • 잡초 잡초
  • 448
  • 0

첨부 1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으라 (요 19:1-4)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고난주일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J.C.Penny 이야기로 고난 주일 말씀을 열려고 합니다.
그는 백화점을 경영하다가 파산당하였습니다. 58세 때였습니다. 파업하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속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돈 벌 생각을 하지 말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고난을 대신 져주어라.>
페니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목사님들이 은퇴하고 나면 갈 곳에 없는 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 프로리다에 콘도 100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은퇴 목사님들을 모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살면서 페니를 위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페니는 미국 전국에 2,000개 백화점을 가지는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겨울없이 봄은 없습니다. 밤없이 낮은 없습니다. 땀없이 달콤함은 없습니다. 고난없이 영광없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알아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지우라 말 한 마디만 하셔도 이루어지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를 가지시고 축사하시니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12 광주리가 남게 하신 분이십니다. 더구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이 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데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을 가요?
예수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실 때 12영 즉 120만명의 천사를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 왜 그대로 고난을 받으셨을 가요?
오늘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여 보며 기독교적인 의미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최고봉입니다. 신학자 파넨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나무 속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처럼 역사속으로 구속사가 흐르고 있다.>

흘러가는 역사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적인 눈입니다. 그는 이어서 역사를 5C라고 요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Creation  창조
  Covenant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계약
  Christ  그리스도
  Church  교회
  Re- Creation  재창조

이렇게 흐르는 것이 구속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당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28장중에 9장이 고난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은 16장중에 6장이, 누가복음은 24장 중에 5장이, 요한복음은 21장중에 8장이 고난 이야기입니다. 사복음서 89장중에 28장이 고난이야기입니다. 약 3분 1이 고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고난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가요?

1. 자초 고난

예수님은 누가 시켜서 고난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초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4-18)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기에 예수님의 고난은 값진 고난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였던 장군은 나포레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장군들은 뒤에서 <공격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나포레옹은 앞장 서서 제일 먼저 가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약했던 군사들도 나포레옹 군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용기 백배하여 좋은 군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앞장 서서 희생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감리교 첫 한국 선교사는 아펜셀러입니다. 그는 성경 번역 협의차 목포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였습니다. 그는 외국인이라 2등칸에 타고 있어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던 여학생들이 3등칸에서 나오지 못 하자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을 구하고 자기는 죽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초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안 죽어도 되는 죽은 죽음이었스니다. 예수님의 고난도 그렇습니다. 안 당하셔도 되는 데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2. 대리 고난

예수님은 예수님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병과 우리의 저주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죄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어느 사람이 물에 빠져서 노도같은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릎쓰고 생명을 걸고 뛰어 들어가서 드디어 건져 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물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용감하게 급살스러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갑니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내게 갚을 돈이 많아요.>
돈을 받으려고 용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대신 무조건으로 죽으신 고난이었습니다. 대리 고난이었습니다.

3. 최대 고난

예수님이 죄인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고난중에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고 하더라도 40대 이상은 매질을 못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칠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 세지 않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사하였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도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의인이 죄수가 되었습니다. 성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강도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최대의 의인이 최고의 악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미국 전쟁중에 아군이 적군에 둘러 쌓여 전멸상태에 놓였습니다. 통신도 두절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밀리에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약도를 가지고 들어가면 다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둘러 쌓여 있는 데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병사가 자원하여 들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두 명은 목숨을 걸고 적진을 통과하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총성이 울렸습니다. 약도를 지니고 달리던 병사가 맞아 쓰러져 죽었습니다. 뒤 따르던 병사도 같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상당한 상처 속으로 빨리 약도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달렸습니다. 적군에게 붙들리더라도 비밀이 탄로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웃으면서 약도가 들어 있는 옆구리를 가르키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모두가 살아났습니다. 시신을 보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는 데 그 상처속으로 약도 종이를 쑤셔넣었가에 피를 많이 흘려서 죽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최대의 고난입니다. 대신 죽는 것만큼 큰 고난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있는 것을 나누어 가질 수는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있는 것을 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까지 주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최대의 고난입니다.

4. 영원 고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며 우리의 죄와 병과 저주를 대신하신 고난은 영원한 고난입니다. 짐승 피의 유효기간은 일년이지만 예수 피의 유효기간은 영원입니다. 짐승 피는 덮는 피이고, 예수 피는 닦는 피입니다. 짐승 피는 구속하는 피이고 예수 피는 도말하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영원한 고난입니다.
어떻게 한번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고난이 2000년 된 우리와 관계된 고난일가요?

몽골의 징기스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00만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가 500배가 큰 온 천지를 다 점령하였습니다. 대단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여기 저기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보를 정확하게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말타기에 능숙한 민족입니다. 기마대가 많았습니다. 기마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몽골과 그들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전화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싸우니까 늘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였습니다. 그 때 징기스칸과 함께 생명을 걸고 싸웠던 이들을 타르탄이라고 말합니다. 징기스칸은  전쟁이 끝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타르탄들에게 6가지 상을 주었습니다.

1. 당신들은 언제든지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내 방에 들어 올 있다.
2. 당신들은 전쟁이 끝나면 노획물을 제일 먼저 골라 가질 수 있다.
3. 당신들은 앞으로 세금에서 면제된다.
4. 당신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9번까지 용서받는다.
5. 당신들은 이 나라안에서는 가지고 싶은 땅을 가질 수 있다.
6. 당신들은 이런 권리를 4대까지 유효하다.

그래서 타르탄이 죽어도 그 후손들은 그 권리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타르탄의 후손은 타르탄 조상 덕분에 6가지 복을 자손대대로 전수 받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갈보리의 타르탄들입니다. 갈보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충성하고 일하면 같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타르탄들입니다. 수 십년 전에 죽은 타르탄 조상의 복이 타르탄 후손들에게 흐르는 것처럼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구원역사가 오늘까지 우리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영원한 고난입니다.

나는 지지난 주간에 양구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낳은 김 수근 화백의 고향이기에 고향 정림리에 김 수근 전시관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교회 옆이라고 집회도중에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보통 억대였습니다. 최고 비싼 그림이 42억에 팔렸습니다. <빨래터>라는 그림입니다. 여자들 몇 명이 빨래터에 앉아 빨래하는 그림인 데 42억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조상 한 분 잘 두어서 후손들은 대대로 이것만 운영하며 살아도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 한 분의 축복이 영원히 자손들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계속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앞으로 영원히 영원히 유효합니다. 타르탄의 후손은 4대만에 끝났지만 예수님의 후손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하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영원한 고난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4가지 특징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청의 고난, 대속의 고난, 최대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학자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은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 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어둠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그만 사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바라는 데 예수님을 친히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앞서 가기를 원하는 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쌓아 놓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모두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더니 큰 영광을 거두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예수님이 댓가로 받으신 영광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추수하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승리하려면 싸워야 합니다. 낮을 보려면 밤을 통과하여야 합니다. 봄을 맞으려면 겨울을 지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면 영광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결론적인 이야기를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금요 철야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열었습니다. 앞에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미국 네바다 주 사막지대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만 펼쳐지는 길옆에 주유소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피곤하면 여행객들이 들어와서 자고 가는 모텔도 하나 있었습니다. 꼭 두 집이었습니다. 두 집 식구는 한 집에 네 식구, 다른 집이 세 식구 모두 7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발레를 하는 여인이 혼자 사막 길을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마침 주유소가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서 기름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모텔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하루 밤을 자고 일어난 그 여자는 그 곳에 매료되었습니다. 고요한 곳, 누가 누구를 간섭하지 않는 곳, 사람을 그리워하는 곳입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이도 없고 스트레스를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 여인은 그 곳에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곳에 머므르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발레이기에 작은 극장을 하나 지어 놓고 날마다 발레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가 보아주는 이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자기가 즐기는 일을 매일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매일 발레를 하면서 7명과 함께 즐기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는 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극장 사면에 사람들을 꽉 차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림 사람앞에서 날마다 발레를 즐겼습니다.

3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60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름을 쥬유하려고 왔던 사람들, 모텔에서 자는 사람들이 구경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유소와 모텔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식당이 필요하였습니다. 누가 식당을 개업하였습니다. 이발소도 개업되었습니다. 슈퍼도 생겼습니다. 교회도 생겼습니다. 자동차 수리센터도 생겼습니다. 목욕탕도 들어 왔습니다. 학교도 생겼습니다. 파출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체국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관공서가 들어 왔습니다. 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발레 마을이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35년 꾸준히 하였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성급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오직 이 땅에 오신 목적만 위하여 사셨습니다. 혼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외치고 싶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