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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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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눅 15:11-32)

얼마 후면 우리교회는 ‘동행축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이 여러분들에게 “기도해라!”, “태신자를 작성해라!”, “데려와라!”등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말들을 들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왜 또 저 난리냐?” “와도 감당도 못하면서..”하십니까?
“여기도 다른 교회와 별 다를 바 없군!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구먼...”

오늘 3월 말에 있는 ‘동행축제’를 맞이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를  누가복음 15장 말씀으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눅 15장 안에는 한 교훈을 주시기 위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비유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에 나오는 비유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 않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나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잃었던 것을 찾았다’는 것이고, 이 비유가 주려고 하는 교훈은 한 마디로  7절과 10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는 공통적으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도록 초청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동행축제’의 의미와 이유는 거기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한 번 데리고 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데리고 온 그 영혼이 회개하도록 큰 친절과 보살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동행 축제’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는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한 영혼이 돌아오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누군가를 초청하여 데려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 중 세 번째 비유인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의 배경을 좀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게 된 이유가 되는 말씀은 1-2절 말씀입니다.

눅 15:1, 2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전통적 유대교의 경건한 사람들 눈에는 최소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매국노거나 사회를 부패시키는 주범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대적인 로마 정권에 내통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무척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가르침이나 규례에 의하면 죄인들과는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한 자와 같이 있으면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서에 보면 심지어 부모된 자들이 자식들이 그렇게 하면 따로 속죄제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말에도 ‘근적자적,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간색 가까이 있으면 빨개지고, 검은색 가까이 있으면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 누구와 있고 어떤 환경에 있는가를 중요시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그 교육을 받고 그렇게 세뇌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경건한 유대인이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맞이해서 같이 말씀도 나누고 가르치시기도 하고, 심지어 같이 먹도 하는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서는 그것이 거슬리고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비난거리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수군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상식과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세 번째 비유는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쭉 읽어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처음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뒤에 가면 그 집의 종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언급이 없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그것은 ‘어머니’입니다. 이 본문에 아버지, 아들들, 종들 다 나오는데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사복음서에 29번이나 흔히 쓰였던 ‘부모’라는 단어조차도 여기서는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 같아 보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이 아주 싹아지가 없고 건방지고 어린 나이에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쓴 것을 보거나, 큰 아들은 자기 기억에 어느 누구도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염소새끼 하나도 챙겨주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아마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즉, 둘째를 낳다가 돌아가셨을 가능성도 높고 둘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아버지가 둘째를 향해 늘 미안해하고 안스러워 하는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보면,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신데 유산을 미리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홀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 돌아가시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재산을 다 챙겨서 아버지를 떠난다는 ‘불효’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시킨 것도 아니고 사업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초청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25절에 보면, 자기 형은 아직도 밭에서 일하는 상황인 것을 보면 그 집에 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13절에도 보면, 이 둘째는 아예 앞으로 아버지를 보지도 않을 생각으로 자기의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정말 나쁜 놈입니다.

돈 갖고 튀어서 먼 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가서 제일 먼저 한 짓이 무엇입니까?
술집에 간 것입니다. 그것도 고급 기생집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놈은 처음부터 그게 하고 싶어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부모를 생각지도 않고 쾌락을 좇아 사는 놈을 성경은 ‘패역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를 구약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신21:18 - 21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그러니까 율법에 의하면 패역한 자식,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불효막심한 놈은 죽일 수 있습니다. 신명기등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인들은 성경에 600여 가지의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랍비들은 이 율법으로 더 많은 구체적인 율례들을 만들어 탈무드에 기록하였습니다. 어느 탈무드에 보면, 아버지가 죽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데 유산을 미리 달라는 놈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둘째 아들 같은 인간은 아버지가 고소하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돌로 쳐 죽일 놈입니다.  이렇게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는 이 둘째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12절입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는 순순히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줘서 재산을 다 분배해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고집 쎄고 패역한 아들이 죽지도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달라고 합니다. 달라고 주면 아버지로서는 그가 그것을 어떻게 할지는 불 보듯 뻔할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재산을 정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지금의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더러워서 확 주어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럴려면 “너 돌에 맞아 죽을래? 지금 니 요구를 철회할래?”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 둘째를 너무 사랑하기에 참고 댓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재산 정리했다고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산을 버리고 둘째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가 훗날에 뉘우치고 돌아올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는 우리가 하고 싶은데로 내 버려 두십니다.
그 종말을 뻔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원하는데로 하도록 버려두십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라도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지금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고, 믿지도 않고 있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하나님이 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무리 패역한 자식이라도 미래를 보고 돌아올 여지를 주기위해 현재 댓가를 지불하고 참아 주고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동행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동행축제’에는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태신자들을 작정하였으면 합니다.

이제 둘째는 큰 돈을 가지고 들떠서 먼 나라로 갑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탐욕과 정욕을 채우는 생활을 합니다.
아침에 해장술하고 낮에 여자꼬시고 저녁에 카바레로 갑니다. 그리고 밤에는 호텔로 갑니다. 갖가지 파티를 열고 자기를 과시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늘 본문은 13절에 ‘허랑방탕’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의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나라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결국 그 둘째 아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 있을 때 옆에 붙었던 친구들과 여인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 둘째는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그 나라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빌 붙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 일이 나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은 율법 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일을 이 둘째 아들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존엄성 자체까지도 다 잃어버린 상태인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비참한 것은 16절입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너무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먹이를 먹으려고 하는데 그것마저 없는 것입니다.
이때 그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18절 19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리고는 이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하두 굶고 못 먹어 마짝 마르고, 나중에 22절에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신을 신기라고 하는 것을 보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완전히 실패하고 망하고 비참하게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장면은 그저 우리가 쉽게 상상하고 지나갈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안에 더 깊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패가망신하고 완전히 돼지만도 못한 둘째 아들이 굶어 죽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으로 가서 종노릇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돌아옵니다.
그러한 실패자 패륜아인 그가 돌아오는데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고 합니다.
거리가 아직도 먼데 아버지는 형체만 보고도 자기 아들을 알아봅니다.
그가 아무리 누더기 옷에 바짝 말라서 형체도 걸음걸이도 달라졌어도 아버지는 그를 알아봅니다. 그리고는 측은히 여겨서 달려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쓰여진 헬라어 ‘달려갔다’는 것은 ‘전력질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가만히 있어도 걸어서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빌게 될 아들을 향해 달려갔을까요?  그것도 전력질주를 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아들이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대개 안보일 때는 불쌍하더라도 막상 보이면 과거의 원한과 섭섭한 것들이 와락 올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같은데서도 나쁜 짓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는 외면하고 그리고 때리고 결국 부둥켜 안고 웁니다. 처음부터 달려가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측은히 여겼다’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측은히 여겼다’는 것은 단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 불쌍했다는 뜻 이상입니다.
그 아들의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불길한 감정을 느껴서 그를 살리려는 열정과 집착이 있는겁니다. 그래서 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열정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왜 전력질주 했는고 하니, 그 아들을 다른 마을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면 돌로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기억하시죠? 신명기 21장요..
패역한 자식은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하죠? 돌로 칩니다.
왜요? 그래야 온 이스라엘이 보고 두려워서 그러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이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둘째 아들을 돌로 쳐야합니다.  그 아버지는 그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보다도 더 멀리 보고 누구 보다도 더 빨리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 아들의 목을 안았다고 합니다.
대개 반가우면 우리는 가슴을 안습니다.
더욱이 장성한 아들을 늙은 아버지가 안을 때 목을 안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을 안았다고 합니다. 왜요?
여기서 쓰인 ‘목’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단칼에 죽일 수 있는 곳이 목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목을 안았다는 것은 그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보호 본능적 행동입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그 아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것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무리 패역한 자식이라도 달려가서 목을 안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행축제’를 준비할 때 죄인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하거나 꺼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22, 23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 비유에서 또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먼저 심판하실 것 같죠?  아닙니다.
가서 뭐했냐? 내가 준 돈을 어디다가 썼느냐? 왜 이 꼬라지가 되었느냐? 등 등 묻지 않습니다.  제일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길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신분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회복시키시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정말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서 아무 것도 아깝지 않은 즐거운 마음입니다.
우리가 ‘동행축제’에 데리고 와서 언젠가 이곳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낌없이 그분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큰 아들처럼 성내거나 삐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동행축제’때 우리가 모시고 오는 분들이 우리보다 더 잘되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뭘 알까요?
대개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가 그 아들을 막연히 기다리고 전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둘째 아들을 확 나타나서 만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을 보세요?
큰 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에 왔는데 집에서 잔치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물어봤습니다.

“뭔 일이냐?”
그랬더니 종이 당신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큰 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랩니다.

그랬더니 그 큰 아들이 한 말을 보세요. 29, 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큰 아들이 둘째 동생이 먼 나라에 있었는데 그가 창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직 오늘 나타난 둘째 동생을 만나지도 않았는데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묻지도 않았구요?
그것은 이 아버지가 그 둘째 아들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 이미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지요?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어디서 뭐했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사서 알아봤는지 소문으로 알아봤는지는 모르지만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아들이 더 화가 나고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다 알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죄인이라도 돌아오면 기뻐하십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알면서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얻는 생명을 그들도 누리고 얻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해야 합니다.
초청을 하였을 때는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친절하게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그가 무슨 짓을 하였고 얼마나 큰 죄인이라 할찌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환영해야 합니다.  이번 ‘동행축제’가 그러한 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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