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고난 (벧전 2:19~21)

  • 잡초 잡초
  • 481
  • 0

첨부 1


아름다운 고난 (벧전 2:19~21)

15세기경 일본의 센리큐(千利休)는 다도(茶道)를 배우기 위해 유명한 스승을 찾아갑니다. 스승은 젊은 센리큐에게 다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정원을 가꾸라고 지시합니다. 센리큐는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고 꽃과 나무를 심어 완벽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미학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정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센리큐는 스승에게 보이기 전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경치가 완벽하여 인공적으로 보일 뿐, 자연 그대로의 소박미가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센리큐는 벚나무를 흔들어 바닥에 벚꽃이 흩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족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는 것을 통해 자연미를 회복하는 정신이 바로 '와비-사비(Wabi-Sabi, 侘―寂)입니다. 다도(茶道)에서 나온 용어이나 일본 고유의 미의식(美意識)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와비'(侘)는 가난함과 부족함 가운데서도 마음의 충족을 끌어내는 여유로운 마음이며, '사비'(寂)는 한적한 가운데서도 깊고 풍성함을 깨닫는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아름다움은 완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어두운 부분이 있어야 전체가 조화를 이루듯이 삶도 어둡고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을 때 더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와비-사비' 의 정신은 복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둡고 추한 부분, 영적으로 완벽하지 못해 고통으로 시달리게 되면 예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만이 어둡고 추한 부분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인 베드로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제국에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인구의 절반 가량이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노예제도 아래서 자행되는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고통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자세를 본문은 제시합니다. 베드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예들이 고난을 참고 복음을 위함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더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노예보다 더 정직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이것이 가능합니까? 노예의 신분이나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됩니다. 우리도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닥쳐오는 고난은 누구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고난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최상의 재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고난이 되게 하려면,

첫째로 생각하라

'하늘의 시인' 이라고 불리는 송명희(Song Myung Hee)는 뇌성마비 장애자입니다. 그녀는 예수를 영접한 후 예수께 드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서두에 "고난의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녀는 당하는 고통이 너무도 심해 예수를 고난의 선생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생님을 좇은 후에 고난은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이 많아져 고통스러움이 더해만 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제곁에 계셨기에 육신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편안했고, 감사함으로 고난의 길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이 있을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고, 슬프고 괴로울 때는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시며 수없이 부드러운 손으로 안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을 만난 후, 건강이 없어도, 지식이 없어도, 많은 재물이 없어도, 선생님이 계시기에 감사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성숙과 이해의 성숙은 고난이 아니면 얻어지지 않는가 봅니다." 주어진 고통과 환경을 뛰어 넘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우리조상들은 고난이 오면 운명이나 팔자로 돌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애매하고 억울한 사정이 있어도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애매하게 감옥살이의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살 때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아름다워지는 비결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고난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고난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 이미 고난이 아름다움으로 변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붙들렸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옥에서 고난을 하나님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기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감사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흑인영가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랴'(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의 내용입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but Jesus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 슬픔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고통의 노래, 슬픔의 노래도 할렐루야의 영광의 노래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도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아름답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참으라

A.D 300년경 마카리우스(St. Macarius)라는 존경을 받던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한 여인이 임신을 하고 마카리우스의 아이라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카리우스를 데려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참았습니다. 도리어 일하여 번 돈을 모함한 여인에게 갖다주었습니다. 다음날도 찾아가 그리스도의 인내를 보여 주었습니다. 얼마 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여인이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자복한 것입니다. 그 후 마카리우스는 존경받는 수도사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참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직면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카비 전쟁'(Machabean war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때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태워 죽이지만 너도 결국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면치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며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았고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공의로 심판한다' 의 '심판한다' 는 동사는 현재시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보복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리라 믿고 끝까지 인내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참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기억하라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한 핀란드(Finland)여인이 심한 폐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휴양을 하며 농사일을 돕던 중 탈곡기에 한쪽 팔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겹치는 고난가운데서 그녀는 기도합니다. "주님, 오른 팔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여인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할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이라고 묻는 여인에게 농장을 양로원으로 개조하도록 하셨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뜻하지 않은 고난이 생기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납니까?' 라고 따집니다. 그러나 '왜' 라는 말 대신 '무엇' 이라는 말을 할 때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고난을 극복하는 삶의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2절에는 고난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신 분입니다. 여기의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 입에 궤사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과 행실에 흠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토록 흠이 없는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당연히 고난도 따를 줄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증거합니다. 고난이 없이 축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삶에 예수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가 감옥에 갈 때 간수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미우시죠?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데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때 킹 목사는 대답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나를 투옥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을 협박해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을 당신들은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사랑이 인종차별의 벽까지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사함을 받고 나음까지 얻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임한다면 불평할 것이 아니라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고난까지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애매한 고난이 온다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부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고난을 깨닫고 부디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