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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으로 강도 만나는 경우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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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강도 만나는 경우 (눅 10:25-37)

본문의 비유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이냐? 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대답으로 하신 비유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므로 참 된 이웃이라고 평가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본문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참된 이웃은 바로 이런 사람이고 진정 거듭난 성도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는 주님의 일차적인 교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에서 또 다른 영적인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가 진정으로 강도 만난 사람이며 그 강도는 어떤 존재 인가하는 것입니다.

1. 누가 강도 만난 자인가?

죄악 가운데 빠진 모든 인생은 강도 당한 존재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생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순간 주어졌던 모든 행복과 은혜는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오직 인간 세계에는 수고와 근심과 걱정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땅과 환경은 저주받아 더 이상 사람이 살기에 낙원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온갖 재난과 사고와 질병이 가득한 아주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한 평생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을 뿐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바라보며 두려워 떨어야 하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강도를 만나서 그렇습니다.

2. 영적인 의미에서 강도는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인간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단입니다. 강도가 여리고로 내려가던 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듯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단 마귀입니다.
마귀는 최초 인간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인간에게 온갖 상처와 아픔을 주며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죄를 통해서 말입니다. 죄는 마귀가 가지고 있는 영혼을 파괴하는 강력한 비밀 병기입니다.
죄는 언제나 탐스럼게 보이고 보암직하게도 보입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것처럼 그럴듯한 포장지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 빠지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마귀에게 강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순간 마귀는 인간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졌고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숲 속에 숨었습니다.

② 이웃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갑니다.
사랑은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귀에게 서로 간에 가져야할 사랑을 송두리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수치심에 못 이겨 나뭇잎으로 벗은 몸을 가리웠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무너진 증거입니다.
사랑을 뺏긴 그들은 서로 비난합니다. 너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헐뜯었습니다. 사랑은 결코 상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의 허물과 상처로 인하여 함께 울어줍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사랑을 뺏긴 그들의 모습은 서로를 부끄러워하며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불쌍한 모습입니다.

③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마귀의 목적은 결국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자신들의 영혼을 송두리채 넘겨줍니다. 그때부터 사단은 모든 사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역사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영혼 사냥꾼입니다.

④ 참된 행복과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여야 행복하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처논 죄의 올무에 걸려든 후부터는 참 기쁨과 참 행복이 없어졌습니다. 마귀에게 다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영혼과 행복을 뺏는 날강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왜 인간이 영혼의 강도를 만나는가를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3.왜 영혼이 강도 당합니까?

① 내려가는 신앙일 때 강도 만납니다.
이 비유에는 두 곳의 지명이 나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입니다.
지형적으로도 예루살렘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평지 즉 낮은 들녘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내려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의미로도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가는 것을 내려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내려가다가 강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내려가는 신앙이 되면 안 된다는 영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내려가는 신앙은 강도의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지금 내려가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올라가는 신앙입니까?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려가다 보면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내려가는 것이 내려가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신앙은 힘듭니다. 점점 더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다고 해서 내려가는 신앙이 되면 강도에게 당하고 맙니다.

내려가는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꾸 인간 편리 주의로만 향합니다. 육신 중심이 됩니다. 신앙생활의 열심히 올라가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뒤로 퇴보하는 영혼을 노리고 있습니다. 딤전 4:15절에 보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 10:39절에서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영적인 악셀레이터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신앙은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계속 영적으로 침체되어 내려가고 있습니까? 영혼의 떼강도들을 이길 수 있는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도 올라가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인 악셀레이터를 밟는 사람들이 많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② 혼자일 때 강도 당합니다.
두 세 사람과 동행했더라면 강도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습니다. 하와도 혼자 있을 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혼자일 때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진정한 친구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원래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ἰα)로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힘써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속에 들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야 사단의 유혹이나 꾀임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전 4:12절에 보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강도인 사단과도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삼 겹줄을 만들어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삼겹 줄이 되려면 세 사람이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거니와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혼의 강도를 만나지 않으려면 영적인 삼겹 줄을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는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대장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중심으로 삼겹 줄을 이루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편에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는 누구에게나 함께 해 주시지만 그 역사와 능력은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종의 편에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우신 일군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주의 일을 하는 동안에 전적으로 성도들은 주의 종의 편에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뼈 하십니다.

출 32:26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는 모두 내게로 나아 오라 라고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리고 나와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출 32:27-29절에 보면 모세가 칼을 차고 우상을 만든 형제 친구를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행한 것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 편에 있었음으로 모세 편에 섰고 하나님은 그 날 하나님 편에 선 레위 지파 사람들을 통해 우상 쪽에 서 있던 3천명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은 곧 모세 편에 있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담임 목사님과 함께 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성도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즉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모이기를 싫어하는 병이 성도들에게 찾아옵니다. 될 수 있으면 모이는 일을 기피합니다. 구역예배 새벽 예배 철야 기도회 등 교회에서 공식적인 예배 뿐 아니라 심방이나 봉사를 위한 모임도 자꾸만 싫어합니다. 신앙생활은 모여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과 서로 사랑으로 얽혀져야 힘있는 신앙 올라가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생황의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화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임의 화합을 깨트리는 일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이 시대 교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교회의 지도자가 잘못해서 교회가 안됩니까? 성도들이 타락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교회를 망하게 하는 요소는 성도들의 모이기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이기를 힘쓰면 이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만사 제처 두고 모여서 기도하고 사랑하며 전도하면 부흥의 불길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자꾸 예배에 빠지고 기도회에 빠지고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신이 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모임에 열심하시기를 바람니다.
이렇게 나와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과 삼겹 줄이 되면 영혼의 강도가 왔다가도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주변에 기도의 동역자들이 함께 있어 든든한 삼겹줄이 된 것을 보고 겁을 먹고 한길로 왔다가도 일곱길로 도망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눅10장에 보면 두 사람이 삼겹 줄이 되는 원리가 잘 나와있습니다.
눅10: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칠십 인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기쁨으로 “귀신도 항복”(눅10:17) 하더라고 말하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0:19에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라고 말입니다. 즉 주님이 보낸 두 사람과 함께하여 삼겹 줄을 이룬 것입니다. 즉 사단을 정복하는데 삼 겹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와 함께하고 주님과 함께 할 때 영혼의 강도를 이길 수 있는 삼겹 줄이 만들어집니다. 성도들을 떠나고 주님을 떠나 혼자일 때 가장 위험합니다. 마귀는 구원받은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인 영혼을 노리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보호에서 멀어지면 안됩니다. 주님안에서 성도들과 교제를 잘 이루어 영혼이 강도당하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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