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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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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요 1:14)

“콰이 강의 다리”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이 태국의 콰이 강에 철도용 다리를 놓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일본군들이 포로들로 붙잡아 온 사람들로 다리를 건설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다리 공사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비가 그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포로들의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일본군은 작전을 빨리 수행하게 되지만 연합군에게는 피해가 가니까, 포로들 중 누군가가 훔쳐서 숨겼던지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전부 불러 모은 후 없어진 장비를 당장 가져다 놓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포로병들 전체가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때에 영국군 포로 한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비를 다른 곳에서 찾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영국군 포로는 내가 희생하지 아니하면 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재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주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재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자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고귀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록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사도행전 16:3에 말씀하시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고난당하신 날을 기념하는 고난주일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자“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제목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세계 4대 성인가운데 한분 정도로 알고 계시진 않습니까?

어느 교회의 장로 후보로 선출된 분이 자방회(노회)에서 시행하는 시취를 보았습니다. 시험 문제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대로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 장로 후보는 답을 쓰기를 “예수님은 4대성인 가운데 한분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이 시험에서 불합격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세계4대성인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 세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미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 더구나 교회의 기둥으로 세움을 받고자 선출된 장로 후보자가 예수님을 4대성인 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로 자격의 심각한 결격 사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깨달아 아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후회 없는 삶의 성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으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었고, 한사람은 돈 많은 부자였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생의 영광을 누리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부자는 불구덩이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삶은 불행과 실패와 영원한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가리키는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부자보다 훨씬 더 복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고, 요한복음을 한 구절로 요약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신양성경 전체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이처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一.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란, 헬라어의 ‘로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목회하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곳은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라는 지역은 헬라 즉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이“로고스”입니다. 로고스란 헬라 철학에서 “세상을 움직여 가는 이성적 원리”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헬라인들이 말하는 그 로고스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실‘로고스’는 우리나라 말로는 그 의미를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특수 용어입니다. 옛 성경에는 로고스를 길(道)자로 번역하여 “태초에 도가 있었느니라.”고도 표현 했습니다. 단지 로고스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헬라 철학은, 하나님은 높은 분이고 사람은 낮은 존재이며, 정신적인 것은 모두가 깨끗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은 다 더럽고 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깨끗한 이성이, 육체라는 악한 감옥에 갇혀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존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럽고 악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론에 반대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곧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2:5~8의 말씀에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시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신인(神人)즉 하나님과 인간의 양성을 겸하신 예수님은 하나님도 되시고 인간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자이시면서 시간 속에 계시고, 신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참으로 우리 인간의 지혜와 이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을“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성육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직접 오셨습니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할 때는 어린 아이들의 언어를 사용하듯,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옛날 하와이 군도 가운데 한 섬인 모로카이 섬은 문둥병자들만 모여 살던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어느 날 벨기에로부터 다미안(Damien)이라는 선교사가 찾아와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온몸이 썩어가는 문둥병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문둥병자들은 그를 비웃으면서“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죽게 되었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도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습니다. 고민에 쌓여있던 다미안 선교사는 어느 날 성전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문둥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불쌍한 저들의 영혼은 살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그 후 다미안 선교사는 자기 몸에 상처를 낸 후 나환자들의 손을 잡고 하는 가운데 그도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간 문둥병자의 모습을 하고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은 수많은 문둥병자들은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고 일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문둥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다미안 선교사의 사랑이며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바로 멸망 받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한 희생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사랑의 극치가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2.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기준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날 날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9:27에 말씀하시기를“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믿으면 영생이요, 믿지 아니하면 그 누구라도 멸망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셨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허물과 실수가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그것이 생명을 얻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많은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간 역사에 오셔서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연대를 계산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아 기원전과 기원후로 쓰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산국가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몇 년 전 주체연호를 사용하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중심, 역사의 기준이 되신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 정의의 기준, 진리의 기준이 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과학, 철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 교육학, 예술 등 모두가 근원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온 것들입니다. 건물 중에도 세계적인 건물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것이며, 음악, 미술 등 세계적인 걸작품의 내용은 모두가 예수님에 관한 것들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그 사실이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二.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본문에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신이 된 까닭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거하신다.”는 말은 헬라 원어의 의미로“천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천막이란 영구적인 집이 아니고 임시 거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에 임시로 머물러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항상 함께 계셔서 내가 당하는 사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혹 실패했거나 건강이 약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00여년전 육신으로 오셨다가 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하셨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사도 요한이 구약성경과 비교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430년간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장막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거룩한 천막)을 만들게 하시고, 그 안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하는 모든 것을 보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사람들에게 친히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죄지은 자를 용서하셨고, 낙심한 자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구약에 있었던 광야의 장막과 의미가 같습니다. 광야의 천막은 낮의 햇빛을 막는 그늘이 됩니다. 밤이 되면 차가운 기온을 막아 줍니다. 즉 보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보호자 목자로 오셨습니다. 이 장막에 거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장막이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중심지였습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물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처 놓은 것입니다. 이 장막은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장막(성막)내부에는 지성소와 성소로 나누어지고,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성소에는 향로와 떡 상, 금 촛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장막을 중심하여 이스라엘 12지파는 세 지파씩 나뉘어 동서남북에 캠프를 쳤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이 장막에서는 레위 지파가 수종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이 하나님의 장막이 진행하면 함께 진행하였고, 어느 곳에 머물면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 되어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해 가듯, 사악한 세상에서 부름 받아 광야 같은 험한 세파를 해치며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장막을 중심했듯, 오늘의 우리들도 육신의 장막 즉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가 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이 움직임에 따라 이동했듯,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생업이, 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에는 무서운 진노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불뱀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을 삼켰고, 때로는 무서운 질병이 나타났고, 때로는 땅이 갈라져 불순종하는 무리를 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장막 가운데, 내 마음, 내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편 122:6~8에 약속하시기를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처소인 성전 즉 교회는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수님은 대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8에“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하셨습니다.

2. 장막(성막)에는 법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인 장막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기록한 두 돌 판을 담아둔 나무상자인 법궤였습니다. 이는 곧 오늘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운데 계시고, 말씀에 의하여 내 삶이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안내서입니다. 이 안내를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곳에 성공이 있습니다. 그곳에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계시자, 말씀의 완성자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승리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성경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놀라운 일이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이 위대해진 것은 영국역사상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국가적으로 인정했을 때에 이뤄졌습니다. 첫째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한“알프레드(Alfred)” 대왕 통치기간에 영국은 미개와 분열과 무지에서 통일된 나라요 문명국으로 발돋움했고, 둘째로, 성경 반포를 공식적으로 증진시킨“엘리자베스 여왕 1세” 통치기간 중 영국은 처음으로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셋째로,“빅토리아 여왕”통치기간에 영국은 국력이 세계에 편만했고 그의 영토가 세계에 산재하여 “하루 종일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영국의 영화가 최절정에 올랐습니다. 외국 왕들이 찾아와 영국이 그토록 위대해진 비결을 묻자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가리키며“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국을 이토록 위대하게 했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미국이 세계 최대강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청교도 신앙의 후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라 통치의 원칙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미국 국새의 뒷면에는 “annuit coeptis”라는 표어가 있는데 이는“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를 지으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축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하시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에 있는 한 교회의 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있습니다. 이 조각이 세워진 경위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처음 짓던 어느 날 높이 세워진 디딤대 위에서 일하던 인부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습니다. 가까이 있던 인부는 떨어진 동료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 가보니 뜻밖에도 떨어진 사람은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살아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인부는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양떼 위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양들 몇 마리가 깔려 죽고 대신 이 사람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위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신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사야 53:5~6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기를“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들을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섬기되 온 마음, 온 정성 다해 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행복의 근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승리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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