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창 19:23-29)

첨부 1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창 19:23-29) 

1. 자크 엘룰이라는 사람이 쓴,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부제목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인데요,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 - 이것은 너무 어렵고 큰 주제입니다만,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 

I.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죄로 일그러지고 깨어진 세상입니다. 

1)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소돔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에 있고,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일그러졌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거울처럼, 우리도 모두 깨어져서 하나도 성한 것이 없습니다. 동성애도 성에 있어서 깨어진 모습입니다. 이혼도 가정이 깨어진 것이요, 우리 마음도 깨어져 있고, 상해 있고, 채워지지 않은 어떤 욕구들이 있습니다. 깨어져 있기에, 늘 아픔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사는 것이 힘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2) 미국에서 몇 년 전에 대형 허리케인인 카트리나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들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일이 있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했다고 하는데요, 그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딸이 TV에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하나님더러, 우리 학교에서, 우리 정부에서, 우리의 삶에서 떠나가라고 해 놓고,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나" 라고 했다는데요, 문제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떠난 것이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것 때문입니다.

3) 로마서 말씀에서도,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우상을 섬긴다고 해서, 다른 종교나 미신을 믿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요, 하나님을 믿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바로 죄로 일그러지고 깨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 적어도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면 - 바로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II. 두번째는, 이런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안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소돔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13절에,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롯을 방문했던 두 천사가 겪은 일은, 소돔이 얼마나 부패한 도시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24-25절에,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유황불이 쏟아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무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후세 사람들에게 타락과 그에 따른 심판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2)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소돔을 멸하시는 하나님만 본다면,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소돔이 멸망했다는 것보다는, 롯(의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1) 우리는 지금까지 롯이 얼마나 세속적이며, 결국 롯이 얼마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는가를 보았습니다만, 그렇지만 성경은 롯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6-9).  

2) 그래서 오늘 말씀은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보다는 의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더 주목받아야 하는 주제입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의인 열 명이 있으면, 그 악인들과 함께 의인을 멸하시겠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을 볼 때도,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히 악인에 대한 심판보다는, 의인에 대한 구원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기서 우리는 그저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는 권선징악의 도덕안에 갇혀 있는 그런 보통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다운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설득할 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달라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18장 25절에서,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죄를 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악의 문제를 다루실 수 있고, 악을 이기실 수 있고, 죄의 문제를 극복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의로우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노아를 기억하사 물심판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창8:1). 마찬가지로 의인 몇명만 있어도, 그 수십만의 소돔과 고모라의 악인들을 용서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멸망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이십니다.  

5)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억만 죄악가운데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억하사, 우리를 심판하시는 대신에,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재판장의 자리에 앉으셔서, 선을 상주고, 죄를 벌주는 그런 기계적인 하나님이 되지 않으시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리셔서, 이 세상을 이렇게 타락하게 만들고, 인간을 깨어지게 해서 고통스럽게 한 죄의 치명적인 힘과 권세를 근본적으로 부수어 버리신 것입니다. 

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고, 죄로 인해 깨어져서 힘들어 하는 우리 삶의 문제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함께 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연약해서 힘들어 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라의 죽은 태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절망과 불가능의 절벽 앞에서 탄식할 때에 기가 막히게 그 문제를 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여시고,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내시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7) 그러므로 어떤 삶의 문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자기 아들까지 희생하면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을 믿고, 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III.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는 성도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롯과 같지 않아야 합니다. 

1) 롯은 이 세상에 동화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에, 물이 넉넉하고 눈으로 보기에 풍요로운 소돔 들판을 택해서 그리로 갔습니다. 당시에 이미 소돔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들인 줄 알았지만 (창18:13), 롯은 소돔을 향하여 조금씩 조금씩 "장막을 옮겨서 소돔까지 이르렀고" (창13:12). 드디어는 소돔에 들어가서 살면서, 소돔의 유명인사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19장 1절을 보면,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 했는데,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재판관과 같은 유력한 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2) 이렇게 롯은 이미 소돔문화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소돔의 불량자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선뜻 자기 딸을 내어 놓는 것도 그렇고, 천사가 롯에게 소돔을 떠나라고 할 때에, 16절에 보시면, 롯이 미련이 남아서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것을 볼 때도 그렇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걸 볼 때도,, 그들이 얼마나 소돔화 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동침해서 자녀를 생산하려는 발상자체가 이미 주변 문화와 사상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롯과 같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1)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다가,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문제들에 초월해야 합니다. 초월하지 못하면 얽매이게 되고, 그러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초월하는 것에 머물러서 안됩니다. 초월 했으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내재해야 합니다. “내재한다”는 말은, –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월하는 이유는 세상과 등지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고, 그래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 초월함 없이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동화되는 것이듯이, 세상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초월도 별로입니다. 우리가 보통 “거룩”을 생각하면 구별되고 분리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산에서 수양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죄를 멀리하는 것을 경건의 훈련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혼자서의 거룩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거룩한 항상 관계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즉, 거룩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가 바로 거룩이요, 진정한 거룩은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변혁적 영성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3.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교입니다.  

1)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요,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교회를 이 세상가운데로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세상속으로 보내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의인은 늘 연약하고, 의인은 항상 소수이지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은 그 연약하고 소수인 의인을 사용하셔서, 타락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기도와 탄원을 들으시고,, 이 땅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는가, 보다는,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느냐에, 이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울리는 사이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향해서 울리는 사이렌의 소리를 듣고 우리가 먼저 깨어나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역할 때에,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이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