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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마음 (행 21: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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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마음 (행 21:17-26)

■ 서론

1. 사도 바울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여정에 심신이 피곤했기 때문에 우선 이들을 쉬도록 했고, 그 다음날 바울과 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 사도를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도 여러 명 함께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도 바울은 흉년에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와 아시아의 여러 이방인 교회와 성도들이 정성껏 모은 구제헌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의 사역보고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지역에서 함께 하셨던 선교 사역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펼치신 놀라운 일들을 들을 때에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놀랍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이렇게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 사도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 사이에서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음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수만 명의 신자가 생길 정도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이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지키는 것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도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은 다 청산하고 이제 예수만 믿으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전부 율법을 지키는 문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하고 관습도 지키면서 예수도 믿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3.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율법도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대단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이방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온다고 하니 ‘일단 오면 한 번 따져 볼 거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게 된 야고보 사도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아주 난감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면 선교보고를 할텐데, 이 일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될까?’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아시겠지만 유대인 가운데 신자가 된 사람이 수만 명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매우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당신이 이방인들과 어울려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서 떠나 자녀에게 할례도 행하지 말고, 유대의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들은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러 주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 중에 하나님께 서약을 한 사람이 네 명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형제께서 그들의 머리를 깎는 값을 대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그대에 대한 소문이 모두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 것과 음란한 행동을 멀리할 것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바울은 그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성전 뜰로 가서 정결 예식이 끝나는 날짜와 그 날에 각 사람을 위해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했습니다.

4. 사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오랜 여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모금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그러한 소문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사도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야고보와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하여 4명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치르도록 섬겼습니다. 물론 본인도 정결예식을 치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시는 말씀에서 바울 사도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점은 무엇입니까?

■ 본론

5. 첫째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했습니다. 23-24절의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바울은 물론 자기의 주장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요청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에 유대인 성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유대인들처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과의 마찰이 무서워서 해야될 일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것은 아니라고 자기 생각을 내세워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대로의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시고 가르치신 제자들이 있고 또 평신도로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는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6. 예전에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할 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서로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의된 사항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과 똑같이 되라고 요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만 25절과 15장 20절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 권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때 서로 합의했던 것들을 내세워 자기의 주장을 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이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평안한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교회의 질서와 덕을 세우는 일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한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일을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의 요청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교회의 권위와 질서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주고 사신 우리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참으로 우리 교회에 주신 권위에 순종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매주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참으로 내게 절대적인 가치와 권위를 가지고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말씀으로 자리잡고 계십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세우시고 위임하신 영적인 리더인 우리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이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권위와 질서는 주님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인 것과 영적인 리더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를 따라서 교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저녁 찬양예배 때에는 제직임명식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청지기의 다짐을 하면서 우리 교회의 제직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며 교회와 우리 목사님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는 청지기로서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질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나가도록 이끄시고 또한 모든 것이 순리로 풀려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필요를 따라 직임을 맡겨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주님께서 세워주셔서 직분을 받으시고 열심히 충성하고 계시는 성도님들과 오늘 세워지실 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목사님과 여러 직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설령 그분들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고 여겨지더라도 그 부족함을 채우며 질서를 따르게 되면, 그래서 그 뒤를 따라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열심히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능력을 더하시고 또 지혜를 더하셔서 교회를 섬기는 마음을 더욱 넘치게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8.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참된 섬김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가운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과 11절을 읽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의 은사에는 여러 은사가 있는데, 그 중에 지식의 은사가 있고 지혜의 은사가 있습니다. 두 은사 모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성령님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식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환란을 피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대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지혜의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의 은사와 함께 지혜의 은사도 있었기에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9.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야고보 사도가 사도 바울에게 했던 제안을 다시금 살펴보십시다. 20-24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제안하고 있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형제여 당신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알립시다. 그래서 우리 중에 네 명의 성도가 결례를 서원하였는데, 당신이 그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의 정결예식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다 부담하시고, 당신도 함께 정결예식을 치르시오. 

그러면 그들과 모든 성도들이 당신이 또한 율법을 잘 지킴을 알게 될 것이요.’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한 것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이것은 굉장한 쟁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다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좋게 여겨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율법은 나쁜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대로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고, 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증거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율법과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유대인에게 보여주자는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거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하게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10. 그러면 이러한 제안을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온전치 못한 복음으로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힘들고 어려운 이방인 전도를 하고 왔더니, 칭찬도 물론 받았지만 오히려 다수가 죄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누가 잘못된 것인지 따져 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 이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라니 거꾸로 이방인 교회 교인들을 혼란시킬 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나 순순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11.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이 결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총본산입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기뻐할 성숙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정확히 이해했고 이방인 선교의 방향도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했다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는 논쟁을 하다가 서로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분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 못지않게 유대인들을 선교하고 섬기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 기분,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예전에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오랫동안 섬기시고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대천덕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 신부님이 한번은 지혜의 은사에 대해서 강해하다가 지혜의 은사는 성령의 다른 은사와 달리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은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해석입니다. 지식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의 차이는 바로 사랑입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 주장하기 시작하면 교회에서도 논쟁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의 은사에 사랑이 더해지면 하나가 됩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12.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 못지않게 유대인 선교에도 깊은 애정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쓴 여러 서신서에 적지 않게 언급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장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1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섬겼지만 또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민족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 선교 가운데서도 늘 가장 먼저 유대교 회당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 외에 다른 기준이 없었습니다.

12.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도 구원하고 이방인도 구원해야겠다.’ 나의 주 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바울은 자기 자존심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자기 고집이나 주장도 얼마든지 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말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예루살렘 교회가 시험에 들면 안되겠다’, ‘참으로 교회가 질서와 권위 가운데 더욱 든든히 세워져야겠다,’ ‘참으로 교회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도록 더욱 섬겨야겠다’는 심정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은사를 가진 바울의 모습, 유대인을 사랑하고 섬긴 바울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참으로 여러분과 저의 모습 속에 이러한 지혜와 섬김이 있으십니까? 구령의 열정이 있으십니까?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우리 목사님께서 4월 7일에 이웃초청 복음대축제 주일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2. 북한선교 하시는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북한 접경에서 밥을 나누는 사역을 하시는 그 분은 언젠가 냇물을 건너 식사를 하러 오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 온 그들의 옷은 남루했고 옷이 얇아 많이 추워보였습니다. 신발은 다 떨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검었습니다. 그 중 79세인 김씨 할아버지에게서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졌습니다. 탈북을 원한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세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이 선교사님의 머릿속에서는 비용을 계산하면서 그들을 안전하게 피하게 할 방법과 이동 경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중국 공안은 어떻게 설득해야 하며, 아이들도 있는데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그러나 길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의 땅에서 맘껏 찬송 한 번 불러보는 게 소원이라는 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때 그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가슴을 쳤습니다. “마지막 결정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지요.” 그리고 그분은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할아버지의 거친 얼굴에는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디요. ‘저 미국에서 온 목사님이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디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네다.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에 가서 찬송이나 실컷 부르고 하늘 집에 가고자 했는데 이 땅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권하는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압네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도 예배당 종도 쳐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해 봤디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디 안같소? 압네다. 내도 압네다.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게 얼매나 좋은겐지. 허나 하나님을 앞설 수는 없디요.”

결국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분은 강한 어조를 말했습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요!” 그렇게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내 계획과 욕망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주님 뜻과 목적에 사로잡혀 사시다가 이젠 천국에 계실 그 김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이은상 시인의 시를 소개합니다. “뵈오려 안 뵈는 님 / 눈 감으니 보이시네 / 감아야 보이신다면 / 소경되어지이다.”


■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천국에 계실 북한의 그 어느 김씨 할아버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며 유대인 성도들을 최선을 다해 섬긴 사도 바울, 이 두 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겸손히 순종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하여 섬기는 자의 삶을 살도록 간구하십시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 신자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리더들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월함 혹은 자신의 사역 혹은 자신의 생각이 옳음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까지도 낮추고 순종과 섬김으로 예루살렘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섬김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를 가진 사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다짐하십시다. 또한 우리 가족, 친척들,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구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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