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겸손과 눈물 그리고 인내 (행 20:13-21)

첨부 1


겸손과 눈물 그리고 인내 (행 20:13-21)

1.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담대하게 살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일생을 던졌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음으로 역사적인 그의 선교사로서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제1차 선교여행, 제2차 선교여행을 거쳐서 이제 그는 제3차 선교여행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이방인 교회들이 모은 구제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자 합니다. 당시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정한 후 들려오는 소문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오기를 벼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알았어도 정작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니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만 하면 즉시 체포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런 위협 앞에서 바울도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착잡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한 한 가지 행동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3. 13절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사도행전을 보면 종종 ‘우리는’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저자인 누가의 시각에서 기록한 것으로, 누가와 바울을 비롯한 선교팀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우리는’ 이란 말에서 바울이 제외됩니다. 바울이 일행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것입니다. 바울을 제외한 일행만 먼저 따로 배를 타고 앗소로 갑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디에서 일행과 따로 떨어지기 시작했을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드로아’라는 항구 도시입니다. 드로아는 지난 주일에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한 밤중에 바울의 설교 중 창에 걸터 앉아서 졸고 있다가 추락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유두고의 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터키 북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드로아는 바울이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럽 곧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일행과 잠시 헤어져 해변도로를 따라 혼자 걸어서 갑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걸어가서 다시 일행을 만나기로 했습니까? ‘앗소’라는 항구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드로아에서부터 앗소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다시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4. 그러면 과연 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항상 함께 다니던 일행인데 굳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고대 문헌에 의하면 당시 그 지역을 육로로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짧은 거리도 아닙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거리가 70리를 훨씬 넘어 80리 가까이 됩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략 35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더욱이 전날 드로아에서 늦은 밤까지 설교를 하고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인 나머지 육체적으로 아주 피곤한 상황입니다. 배를 타고 일행과 함께 여행하는 게 어떤 면으로 보나 유익하고 편하게 보입니다.

5. 그러나 일행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뿌리치고 혼자 여행한 데는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오순절을 앞두고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상황이지만 그가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죽음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혼자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걸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길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신앙도 점검해 보면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대비하고, 남은 인생에 대해 마음을 다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의 하프타임’을 가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생의 중간 결산’을 한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그렇게 한 것입니다.

6. 바울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이런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자동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갈 때 중간 지점에서 잠시 정차합니다. 그때 자동차 정비소에 들어가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정비한 후 다시 출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은 여정을 잘 달려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축구경기에서도 전반 45분을 열심히 뛰었지만 후반 45분도 끝까지 잘 뛰기 위해서는 하프타임 10분동안 얼마나 잘 쉬는가, 후반전에 이기기 위한 작전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숙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후반 45분 동안 전반전 못지않게 열심히 뛸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정말로 쉴 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겼고,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1,2,3차 선교여행을 쉴 새 없이 하면서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했고,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게다가 이제 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로부터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예루살렘에 가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마음이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품고 달려온 인생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불과 며칠 동안이었지만 일행들과 잠시 떨어져서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도보로 걸으면서 자신의 삶과 복음 사역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쉼 없이 달려온 복음전도의 삶,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나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를 계획했을 것입니다. 그동안에 보지 못했던 하늘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곧 인생의 하프타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8.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두려운 게 인지상정입니다. 바울도 어쩌면 죽음의 위협 앞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걸으면서 주님 앞에서 자신의 구원 문제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기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십자가 은혜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도 기억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게 될 행선지를 다시금 기억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가보면 여러 대의 버스들이 시간에 맞추어 출발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선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출발지는 동일하고 경부고속도로 반포 IC로 진입하는 것은 같지만, 결국 행선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여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가 가는 최종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이것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위험이나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도 다시 한 번 이런 확신으로 충만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9.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는 서로 의지가 되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홀로 떨어져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를 체험하면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있어도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심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홀로 70리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합니다. 아무리 길이 험해도, 외로워도 여전히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결국 바울은 새 힘을 얻고 용기백배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0. 또한 바울은 홀로 걸으면서 성큼 앞으로 닥쳐온 죽음을 의식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 목적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대로, 사명을 위해 사는 게 가장 지혜롭고 복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장 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1. 그러면 바울은 이런 시간을 갖고 난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14-16절을 잘 읽어 보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앗소에서 일행과 다시 합류한 바울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소에서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약 45km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에베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입니다. 

바울에 있어 에베소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로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3년 동안 에베소 교회를 섬기며 교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지냈습니다. 그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언제 다시 그곳에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천국에 가서나 만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정리를 생각하면 아무리 바빠도 잠시 들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지나치기로 결심했다는 겁니다. 구제헌금도 전달해야 되겠고, 오순절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 때문에 빨리 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모습 가운데 두려움이나 걱정, 망설임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은 70리 길’에서 새롭게 영적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12. 그러면서 바울은 17-18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가 가지 못하는 대신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의 요청을 받고 즉시 밀레도에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부터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님이 피를 흘려 주시고 사신 교회의 성도들을 부탁하는 설교를 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의 성도들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25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설교니 그 간절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의 마음의 중심을 아낌없이 털어놓고 있습니다.

13. 특히 18-21절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그동안의 선교사역과 목회사역을 회고하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한 설교의 앞부분입니다. 18-21절을 제가 봉독하여 드립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14.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 곧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어떻게 사역을 감당해 왔는지를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도 연관 지워서 그동안의 그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의 요소, 즉 겸손, 눈물, 인내라는 세 개의 핵심 단어로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5. 첫째, 그의 사역은 겸손의 사역이었습니다. 19절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바울은 오직 겸손함으로 사역했습니다. 목사이든 교인이든 우리 주님을 위해 일하기 원하는, 또 일해야 하는 사람의 첫 번째 자질은 겸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제일가는 미덕은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며,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맡기시는 사역자를 택하실 때 첫 번째로 보시는 자질이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서 겸손함으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면서 겸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16. 둘째, 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눈물 없이 자식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가슴 속에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와 같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3차에 걸친 선교여행 중에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하였고,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교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복음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를 늘 노심초사하며 기도했고 그래서 그만큼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그는 교인들이 아파하면 자기도 아파했습니다. 교인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부짖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사랑하고 염려하면서 그 영혼을 부둥켜안고 영혼의 의사이신 우리 주님께 눈물 흘리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17. 셋째, 그의 사역은 인내의 사역이었습니다. 역시 19절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으면 참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믿음이 없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합니다. 부모는 어떤 경우라도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세운 여러 교회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들이 믿음에 강건하게 설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한 시험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견뎠습니다.

18. 이렇듯 바울의 사역을 겸손, 눈물, 인내라는 세 가지 핵심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서 그 귀한 사역을 감당했던 것은 바로 그에게 주님이 주신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눈물을 흘려야 했고 끝까지 인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할 수 없는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독사에 물리기도 하고, 배가 파선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춥고 배고프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오직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런 사명감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고, 로마에서 투옥된 후에도 줄곧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마지막으로 보낸 유언적 서신인데,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그는 참으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과 하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 마지막까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인생의 후반전과 같은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잠시 하프타임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때때로 이러한 하프타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은 아니신지요? 잠시동안 쉬는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충전의 시간, 반성과 회개와 내려놓음, 그리고 다시 새롭게 계획하고 시작함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요? 앞만 보고 달려야지, 그런 여유조차 없으시다고요? 

사도 바울도 그리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잠시동안 인생의 하프타임 시간을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명에 대한 확신을 다지는 시간으로 참으로 소중하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또한 그런 인생의 하프타임의 시간을 바울처럼 지혜롭게 가지시고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에 인생의 남은 후반전의 삶도 보다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20. 이제 저는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주님께서 주신 귀한 달란트를 주님과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함으로 최대한으로 사역하다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주님께로 간 한 여대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여대생은 장신대 교회음악학과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는데,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10개월간 투병을 하다가 하나님께로 간 학생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장신대 김운용 교수님이 전하셨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 성도들과도 나누기 원합니다.

“몇 년 전 대학 교학처장을 하고 있을 때 학생들 몇 명과 함께 한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학생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교회음악학과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그 학생은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동남아시아에 6개월간 견습 선교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아이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였고 떠나올 때는 용돈 절약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중고 피아노를 사서 선물하고 올 만큼 마음이 따뜻한 학생이었습니다. 

2009년 2월, 방학 내내 준비해 온 일본 찬양선교를 출발하기 직전에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학생이었습니다. 10개월을 투병하다 결국 하나님 품으로 갔고, 딸 아이를 세밑 차가운 날씨에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까 조금 걱정하면서 갔는데 오히려 은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장례 예배 때에 거기에 참석한 30여 명의 학생들이 친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안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도다...”라는 찬송을 눈물로 찬양했습니다. 성악 전공자들이기도 했지만 친구에게 외치듯 부르는 찬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찬양이 시작되자 옆 상갓집에서도 찬양을 듣고 싶어 몰려왔습니다. 그 학생의 짧고도 고운 인생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와 눈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 후 부친이 투병하던 10개월 동안의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친이 개척한 교회의 아동부를 맡았는데 무에서 시작해 몇 달 만에 3백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학교로 성장했다고 했습니다. 급성장한 아동부를 돌보자니 주일에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런데 오후에 말기 암 환자의 몸을 이끌고 부근의 군부대 교회를 찾아가 찬양을 인도했다고 했습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걱정이 된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더니 그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아빠, 어쩜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대충할 수가 없어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고 생각하니 대충 만날 수가 없어요. 오늘 부르는 찬양이 마지막 찬양이고, 드리는 예배가 마지막 예배이고, 드리는 기도가 마지막 기도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대충할 수가 없구요. 이 작은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 알았는데 그걸 놓칠 수가 없어요. 아빠도 큰 일 하시면서 작은 일 놓치지 않도록 하세요….”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던 짧디 짧은 그 삶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선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올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해이고, 이것이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의 자세라고 했던가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끝이 있는,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마종기 시인은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라고 외쳤을 것이고 백창우 시인은 “이제 숨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 보자/ 큰 것만 그리느라 소중한 작은 것은 잃어온 건 아닌지...”라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가 시작되었고, 3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시느라 정작 중요하고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잠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는 인생의 하프타임을 가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부족한 저 또한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꼭 1년 남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바로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절감했습니다. 나이가 20이든, 40이든, 50이든, 혹은 60이거나 그 이상이든지, 하나님 안에서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게 불과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나이가 몇이든 참으로 복음의 사명을 깨닫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1부 예배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 2013년에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성도들이 아닌, 인생의 하프타임을 가질 줄 아는 성도, 그래서 올해 주신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겸손과 눈물과 인내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는 성도,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 사명의 확신을 분명히 가지고 인생의 후반전을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교회를 위해서 달려가기로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