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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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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행 4:13-22)
  

들어가는 말

국민일보 2월 22일자 미션라이프 섹션에 전 건국대 교육대학원장이셨고, 현재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장이신 ‘오성삼’ 장로님의 간증이 나왔습니다.
그 글 중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내 인생의 전반부는 철부지 어린 시절을 빼면 내내 비가 내렸다. 물에 젖은 성경책과 찬송가 한 권을 남긴 아버지, 재봉틀에 의지해서 아들 셋을 홀로 키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새벽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그분들이 가난과 함께 주신 것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한 힘이었다. 120명을 뽑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응시생 122명 가운데 121등을 한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겪은 어려움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고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대학시절 대학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고 배를 곯아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입학시험 문제지를 팔 때 수위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대학 교수의 꿈을 키웠다. 병마로 ROTC 임관을 못했을 때도 흔들렸을지언정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등병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원 준비를 했다. 유학생활 중 겪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내 인생에 장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비는 끝이 났고 지금 나는 힘들게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다. 

“일요일 예배를 끝내고 교회를 나오던 두 친구가 있었다. 교회에 나오자마자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친구는 교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도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 친구가 조바심을 내며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비가 그치기는 할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자넨 그치지 않는 비를 본 적이 있나?’”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비가 없듯이 인생에서 끝나지 않는 시련은 없다. 고백하건대 오늘의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오성삼 장로님은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롭게 되어, 그 이름을 자랑하고, 그 이름에 생명까지 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 말씀은,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의 문중이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을 때 대답한 말입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은 사도들이 그렇게 힘차게, 생명을 내놓고 증거한 이름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예수의 이름이 그 사람을 건강하게 했다‘고 증거 합니다.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다고 증언합니다.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름 예수!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던 사람을 일으킨 능력 있는 이름!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름!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신 이름!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실 이름!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성결하게 하시는 이름!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팔자를 고쳐놓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시장 안나스의 문중 사람들은 바로 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명령하면 사도들은 기가 죽어서 아무 소리도 못할 줄 알았습니다.
석방해주는 것만이 고마워서 허리를 굽신거릴 줄 알았습니다.
사실 보통사람이라면 그래야만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공회원들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도 바로 이 공회원들의 결정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자리입니까?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비굴한 변명도, 생명을 부지하고자 하는 가련한 하소연도, 살려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의 말을 들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까요? 사람의 말을 들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아니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삽니까?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당연히 옳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스운 것입니다. 가당치도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놓여서 다른 사도들에게 가서 보고했을 때 그들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24-26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이시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주님을 거슬러 세상의 왕들과 군주들이 작당을 하는데 ‘우습지도 않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인관관계 때문에, 경제적인 손익 때문에, 자기의 고집 때문에, 사람 편에 서지 마시고 하나님 편에 섭시다!  

‘해후’라는 한국 영화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video tape로 보았습니다.
너무 슬퍼서 두 눈이 벌겋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 영화는 대동아전쟁, 6.25동란을 겪으면서 한 평범한 가정이 헤어지고 만나는 서러움과 기쁨을 통하여 민족의 비운을 그린 작품입니다.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큰 며느리는 대동아전쟁 때 징병으로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면서 수절을 합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는 6.25전쟁 때 남편이 이북으로 끌려간 후, 시집 집안에서 ‘청춘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고 하여 떠밀려가듯이 피붙이 하나를 남겨두고 재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남편들의 생존을 알게 합니다. 
중국 연안성에서 작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옵니다. 
그 때 재가한 작은 며느리가 수절한 큰 며느리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님은 얼마나 떳떳합니까?”
재가한 작은 며느리는 ‘하루도 아내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남편을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순간순간마다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 그날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 합시다.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때 가서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대교회 저스틴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라는 로마 재판장 앞에 끌려갔습니다.
어떤 위협에도 저스틴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재판관은 저스틴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천국에 올라가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저스틴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알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와 대담함이 나온 것입니까?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조그마한 하녀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스승이신 예수님이 로마 군병에게 잡혀가실 때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꽁무니를 뺏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여기에 제자를 제자 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그 진리에 생명을 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된 성령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행7:54절 이하에 보면 초대교회의 한 위대한 집사인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얼굴은 햇빛처럼 빛났으며,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한 다음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요?
행7:55절에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성령 충만하심이 기독교인을 진실로 기독교인 되게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환영하십시오! 
성령님을 인정해드리십시오! 
성령님을 앞세우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의 뜻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기도하십시오!

2.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마치 아침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엄청난 박해의 기류가 감싸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너무도 성도들을 옥죄어 숨조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나갈 기독교인들의 무기입니다.

케냐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안찬호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서울에서 임마누엘교회의 신학생을 중심으로 vision trip을 왔습니다.
그 학생들이 귀국하려고 공항에 나왔는데 체류기간이 만료되었다고 이민국에 갔다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행기 이륙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난감하더랍니다.
‘이때야말로 기도해야할 때가 아니냐?’ 
그래서 공항 대기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통성 기도를 시켰답니다. 
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주여!’하고 통성기도를 냅다 했더니 공항 출입국관리책임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제 손으로 stamp를 다 찍어주면서 ‘어서 비행기를 타라’고 하더랍니다.

아무튼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무기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앞에는 사탄이 굴복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죄의 수령에 빠지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저들의 기도내용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 다시는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원수들을 일격에 때려 부숴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저들은 위협이나 박해를 면제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험이 없는 날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시험을 가볍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모진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육신의 생활이 지치도록 힘겹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나는 너무 힘겨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런 것들은 있어도 좋으니 이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이런 기도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려운 상황은 더 큰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계7:9절 이하에 보면, 천국에서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주님 보좌 곁에 서 있던 한 장로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4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에서 나온’ 성도가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닥치는 시련에 관심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나 죽으나 복음전도, 잘` 되나 못되나 복음전도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성령 충만하심으로 평생 하나님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2.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상황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힌 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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