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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막 8:31 - 막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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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막 8:31 - 막 9:1) 

가방이나 옷이나 신발에는 명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은 비쌉니다. 한번 사려면 주머니 사정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품을 갖고는 싶은데 돈이 없으니 대신 나온 것이 짝퉁입니다. 싼값에 사서 명품 흉내라도 내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가짜가 더 진짜 같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짝퉁을 진짜로 착각하여 많은 돈을 주고 사기도 합니다. 영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사탄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니 적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계시니 악령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속게 마련입니다. 

구약을 보면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사 45:3, 겔 20:20)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옛날에도 가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 개구리, 파리, 메뚜기, 태양 등이 자기들의 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열 가지 것들에 재앙을 내림으로 누가 참 신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언약궤를 약탈하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이 최고의 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다곤 신당에 갖다 놓으니 신당 안에 있는 다곤 상이 넘어지고 심지어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지고, 이어 독한 종기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재앙을 통하여 여호와가 참 신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여호와가 참 신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기에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진짜 제자입니까? 혹시 짝퉁 제자는 아닙니까? 물론 궁극적인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만 수시로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오늘의 본문이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옵니다. 머지않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하여 입술로만 고백을 한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본문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뜻 깊은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인지 점검해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신적인 문제도 해결하셨습니다.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하여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시며 에스겔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귀머거리와 반벙어리, 소경을 고치시며 이사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또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였기에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 하시며 답답해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한 번도 직접 밝히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관찰하게 한 후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제자들은 당신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하십니다.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은 벳세다에서 북쪽으로 한 25마일쯤 떨어진 헬몬산 서남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단강 물 근원 중 하나인 헬몬강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곳은 알렉산더가 정복한 후에 재건되었고 풍요를 상징하는 헬라 신 판(Pan)을 기려 파네아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성읍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고 그는 그곳에 흰 대리석으로 웅장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 후에 헤롯 빌립은 이 성읍을 확장하고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생각나게 하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평소에 듣던 대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며 전에 세례자 요한이 전하던 것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시니 세례자 요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엘리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능력있는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이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만을 보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무엇인가 보다 나은 대답을 기대하시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제공해야 할 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한 제자들임을 시사합니다.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지난 700년간 예언되어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려오던 메시아,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당신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할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호칭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야기될 수 있는 그릇된 기대와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난을 예고하십니다(8:31)

사지선다형 문제를 풀다가 잘 몰라서 연필을 굴려본 적이 있습니까? 굴려서 글자 있는 데가 위로 오면 1번, 그 다음에 2번 등등. 운이 좋으면 맞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뛰어난 통찰력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맞춘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이 그들에게 임하여 귀한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아직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가르치시니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하리라.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개념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메시아적인 인물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은 이사야 5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스가랴 13:7-9절은 선한 목자가 수난을 당하고 양떼들 역시 흩어져 환난을 당하지만 그 연단을 통하여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스가랴가 언급한 ‘두들겨 맞은 목자’로 보았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막 14:27) 

또한 호세아 6: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시고 사흘 만에 살리시고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목자로서, 또 이스라엘로서 죽으시고 또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운명 전체를 스스로 짊어지셨고, 그들에게 임할 종말의 심판을 대신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사상 속에 깊이 흐르는 메시아관입니다. 

수난과 죽으심,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주목할 사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대적들의 승리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서곡이자, 영광의 수단이며,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고 소망을 가져오며, 따라서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오해합니다(8:32-33)

그런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이룬다는 메시아관을 가졌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연약하고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그런 생각을 반영합니다. 성미 급한 베드로가 한 마디 합니다. 개역개정판에는 ‘붙들고 항변하다’로 점잖게 번역되어 있으나 헬라 원어는 ‘꾸짖다’는 뜻을 가집니다. 

마 16:22,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합니다. 얼핏 들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말합니다. 선생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로 답변했을 때는 귀한 고백을 하였으나 인간적인 생각이 앞섰을 때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생각이 앞설 때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관록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지 사탄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태도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결과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은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본능이 제자도와는 결코 조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는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수치보다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과 구원을 얻게 될 영혼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8:34-9:1)

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들을 당신 곁으로 불러 주님을 따르는 도를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말씀하시려는 내용이 십자가를 만류하려는 제자들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생각과 기대를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영생과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죽음의 길을 가로막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죽음의 길에 동참함으로써만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1)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은 자존감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욕구를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만족만을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함이란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정욕과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5:24).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손해요 자신을 잃는 것 같이 여겨지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진정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함, 즉 철저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처형당하는 장소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6절을 보면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aorist)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하고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지금 당장 주님을 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좇으라’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계속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3) 잃음으로 얻는 사실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순종의 삶이요, 희생의 삶이요, 헌신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5-36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리석은 행위로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을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본받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매순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를 위하여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자신이 당할 수난을 밀알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에서 기꺼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이나 습관들을 다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멸시나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손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한 수고를 인하여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얻는 삶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신앙의 신비입니다. 제자의 삶은 특별하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하나 되어 자기의 옛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드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주님의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우리의 눈이 가리어질 때 우리는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이 필요하지만 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무리들처럼 주님에게 표적만 구하는 신앙인은 아닙니까? 입술로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말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거짓 제자는 아닙니까? 거짓 제자들은 말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떠벌이면서 실상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과 골고다까지 따라왔던 여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가는 자들입니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신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의 목회비전이 무엇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나 18년이나 지난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려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무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위로(upward)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안으로(inward)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밖으로(outward)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돕는 수단으로 소그룹 사역을 강조합니다. 목장을 통하여 우리가 깎이고 서로 섬기고 세우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목장과 더불어 선교회가 있고 사역부서가 있습니다. 이 사역들이 활성화되려면 한두 사람의 독려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워진 리더들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이자 유일한 소원은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합니까?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때로 금식하고, 사랑을 베풀며 어느 때보다 뜻 깊은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제자들이 팔로마 한인 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주님이 칭찬받는 교회요, 소문이 퍼지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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