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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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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2-30)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성경 인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세례요한은 사역 자체가 특별했습니다. 예수님 직전에 와서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사역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했고, 그 길을 닦았습니다. 참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세례요한이 특별한 것은 예수님께 아주 특별한 평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마 11: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큰 인물이라고 극찬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이렇게 극찬을 받은 사람이 세례요한 외에 또 누구 있습니까? 정말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선 본문 2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이 사실을 세례요한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말이 이렇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 말 속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불편한 마음’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저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예수님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메시야’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고작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의 인기가 더 높아지자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만 왔는데,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의 이런 보고를 듣고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그 권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실 때 자기를 찾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최초로 인정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분이라는 점을 세례요한만이 인정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보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안타까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실입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해왔습니다. 그러다 일본이 자랑하는 도오고 헤아하치로오에 의해 이순신 장군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도오고 제독은 러일전쟁 당시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틱 함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해전은 세계 5대 해전에 꼽힐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가 개선한 뒤에 축하연회에서 사람들이 그를 높이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의 대승리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을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시킨 넬슨 제독에 필적할만한 당신은 군신입니다.” 

이 때 도고 제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칭찬의 말씀은 고맙지만,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정말로 군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순신 정도겠지요.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조상들에게 치욕을 안긴 적장이요 원수를 인정하고 높인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이순신 같은 위대한 인물이 있었지만 우리가 인정해 주지 못하고 남이 인정해 줘서 나중에서야 위대한 인물로 높이고 있다는 점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인정하기 힘이 드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현대라는 극심한 경쟁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시대, 남을 끌어내려야 만이 내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시대 속에서 남을 인정하기란 정말 힘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시기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내려보려고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아마도 부모가 부자여서 남다른 과외를 해서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투기를 해서 그렇게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빠르게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남다른 줄을 탔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의 장점을 인정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점을 세례요한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 특별한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2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 자기의 마음을 한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결혼식 비유입니다. 당시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참여해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바로 들러리 역할입니다. 신랑이 결혼 예식이 치러지는 신부 집으로 향할 때 신랑 친구들이 들러리로 함께 합니다. 대체로 늦은 저녁에 어둠을 밝히며 신부 집을 찾습니다. 무사히 신부 집에 도착했을 때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 때 들러리였던 신랑 친구들은 자기들의 들러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인해서 기뻐합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마음이 바로 이런 신랑 친구들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메시야가 오셔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메시야를 알아보고 메시야께로 나아갑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례요한은 마치 신랑 친구들처럼 그 마음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의 인기가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예수가 등장하여 인기가 치솟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 자기의 최측근들마저도 불안해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놓았던 것들이 다 무너질 판입니다.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기뻐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기뻐해도 보통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도대체 세례요한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사명 때문입니다. 자기의 사명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께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사명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이점이 또한 특별합니다.

빌 1:17-18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 중입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바울의 반대파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해서 바울을 괴롭게 하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쨌거나 복음이 전파돼서 기쁘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돼서 기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의 사명인데 그 사명이 잘 이루어지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선교 여행에서 한 가지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 10여년 매년마다 함께 중국선교 여행을 해온 미국의 나인수 장로님과 주숙명 권사님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30년 넘게 운영해 오던 병원도 문을 닫고 집도 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60대 중반, 노후를 준비해야 할 상황입니다. 누구보다도 미국에 잘 정착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분들의 답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에 와서 30년 넘게 자식들 잘 키우고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생을 정리할 때가 다가오는데, 남은 30년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몽골과 같은 나라에 가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치료해 주며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당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온전히 헌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속 깊은 곳에 두려움이나 염려보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은 사명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에 헌신할 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 사명이 완수되는 것을 볼 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기쁨을 맛보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세례요한이 결론적으로 자신의 제자에게 한 말입니다. 다시 직역을 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그분은 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결혼식에서 신랑이 커지기 위해서는 신랑 들러리인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주목을 받아야지 신랑들러리가 주목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이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사역은 들러리의 사역이었습니다.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사역이었습니다.
드디어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직접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분이 본격적인 세례를 베푸십니다. 당연히 들러리의 사역은 끝이 나야 합니다. 더 이상 조명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세례요한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나타나시자 자신은 그동안 짊어지고 가던 무거운 사명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내려놓아야 할 때 계속 짊어지고 간다면, 오히려 주님을 위해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이라는 말은 이용규 선교사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널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려놓음이라는 말은 ‘포기’라는 말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우선 포기라는 말과 내려놓음이라는 말은 하려던 것을 중단한다는 뜻에서는 같아 보입니다. 포기도 하려던 것을 중단한 것을 말하고, 또 내려놓음도 하려던 것을 중단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려던 것을 중단하는 이유가 다릅니다. 포기는 하려던 것을 할 수 없게 돼서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게 계속할 힘이 없을 때 포기합니다. 계속하고 싶어도 상황이 계속할 수 없게 펼쳐질 때 포기합니다.
이와 달리 내려놓음은 하려던 것을 계속 할 수 있지만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때문에’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그 자매는 몇 달 전 우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먼저 믿은 우리 중에는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다. 

그렇습니다. 내려놓음은 주님 때문에 할 수 있는 일, 때로는 해야 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중단할 때 주님께서 그 이상의 풍성한 것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 때문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때문에 내려놓는 사람들 그들을 주님께서 특별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특별하게 여길 때 주님도 우리를 특별하게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특별하게 인정할 때, 주님도 우리를 특별하게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특별하게 기뻐할 때, 주님도 우리에게 특별한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특별히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하게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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