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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의 말이 그친 그 후 (욥 31: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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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말이 그친 그 후 (욥 31:35-40)    

제가 운전을 한 것이 22년 정도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초보이던 무렵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오려고 차를 후진하여 빼던 중 내려오던 택시와 범퍼가 살짝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별 느낌이 없었고, 뒤를 돌아봐도 기사님도 별 말이 없어서 그대로 교회로 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있는데 경찰관이 찾아왔습니다. 뺑소니로 신고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에 가 보니 신고를 한 기사님이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때 아무 말씀도 없기에 전 닿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지금 택시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부분이 파손되었는지 말씀해 주면 고쳐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잠시 밖에서 이야기 좀 하겠다>고 하더니 저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 보니 그 택시는 사방이 긁히고 찌그러져 도대체 어느 부분이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가 없는 폐차 직전의 택시였습니다. 결국 기사님은 <요즘 손님도 없고 속이 타니 아침 값이나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간단히 끝났지만, 파출소에 가던 제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목사 체면에 뺑소니로 신고가 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또 기사 양반이 성품이 악한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새벽에 차를 뺄 때 약간 닿은 듯한 느낌도 있었기 때문에 개운치 못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파출소로 가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한 것은 저만은 아니었습니다.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도 모를 정도를 가지고 신고까지 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손님도 없고 하니 돈이나 좀 받을까 하는 마음에서 신고를 한 것 같았습니다. 저나 그 분이나 마음이 개운치 못한 채로 파출소에 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경찰서에 불려가거나 재판정에 불려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평생 고소당하는 일도 없어야 하고, 고소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을 고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는 말은 <고소할 테면 하라. 기꺼이 재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무엇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너무도 억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만났을 때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매우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욥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은 이렇게 큰 고난을 당할 정도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욥과 친구들의 관계가 매우 서먹해졌습니다. 욥은 실망한 나머지 <정말 내가 그렇게 나쁜 죄인이라면 차라리 고소하라>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35절의 <나를 고발하는 자>란 욥의 친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도대체 어디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정>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 실망한 그는 하나님이시라면 공정하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35절 앞부분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란 말을 직역하면 <누가 나를 위하여 나에게 들음을 주겠느냐?>가 됩니다. 욥에게 절실한 것은 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들어주기만 해도 인생의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욥은 <도대체 누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인가? 하나님이시라면 내 말을 들으시고 내게 정당한 대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라고 했는데, 그는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 자신의 서명이 담긴 서류를 제출한 것과 같았습니다. 

40절 맨 끝 부분을 보십시오. <욥의 말이 그치니라>고 했지요? 그는 더 이상 사람들과 맞서서 말하기 싫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해 보았자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그친 후>에 무슨 일이 있게 될까요? 그 후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만 있을 것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원고, 검사, 변호사의 말이 끝나고, 피고의 최후진술까지 끝난 후에는 판사의 판결문 낭독을 경청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말이 그친 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들을 듣는데 지치고 말하는 데 지친 욥은 어서 빨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길 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법정에서 하나님의 판결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욥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그 문제가 인생 전부와 목숨이 걸린 것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어떤 곳에서 의문의 시체가 발견이 되었는데, 현장에서 한 사람이 붙잡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단지 그 곳을 지나가던 사람이었다고 합시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평소에 명망 있는 인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언론은 그가 유명한 사람이기에 더 크게 보도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아, 그렇게 훌륭해 보이던 사람이 그런 끔찍한 일을 했어? 사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 때 만약 법정에서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평생 살아온 과거와 생명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 때 그의 말을 정확히 들어줄 사람, 억울하지 않도록 정확한 판결을 내려줄 사람이 얼마나 절실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우리 자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또 이런 사건에 휘말린 게 아니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사람이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면 억울해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직장에 출근해서 최선을 다해 일을 했건만 회사가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책임까지 떠넘긴다면,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잘 하느라고 했는데 아내가 면박만 준다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건만 부모가 그 수고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할까요? 사람이란 자신의 존재, 수고, 노력에 대해 정당한 인정을 받아야 살맛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또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책임성>입니다. 우리 삶이 끝나고 나면 주어진 생명과 시간과 기회에 대하여 바르게 살았는지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삶의 책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소유나 지위나 지식이나 신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들에 의해 평가됩니다. <바른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 다른 이들에 대해 정당한 태도와 사랑을 가졌는가, 인생의 열매를 맺기 위해 정직한 땀을 흘렸는가, 이 모든 일들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랐는가?> 등의 기준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세상 법정에  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매우 중요한 결정적 질문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당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재판에 나가는 사람의 모습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죄를 지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려 합니다. 그러나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은 얼굴을 똑바로 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서겠다고 할 때의 욥은 매우 당당했습니다. 36절을 보면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고 하지요?  <어깨에 멘다는 것>은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는 오히려 법정에 나가는 것을 왕관처럼 여기겠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또 37절에서는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모두 하나님께 말씀드리겠으며, 고귀한 왕족처럼 품위를 지켜 하나님께 가까이 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온 과거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결코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약 지금 한 사람씩 불려나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조사를 받는다면 털끝만큼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이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1521년 1월 21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된 후, 교회로부터 영원히 제외되는 출교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는 정부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의 박탈을 의미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면 루터의 생명을 자유롭게 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루터가 출교 되자 <카를 5세>는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의회에 나가지 말 것을 권하 였지만, 루터는 <만약 보름스의 지붕의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해도 나는 그 곳에 가겠다!>고 하면서 보름스로 향하였습니다. 

보름스 의회는 1521년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루터의 사상을 심의하였습니다. 이 의회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독일의 여섯 선제후, 24명의 공작들, 8명의 후작들이 참석하였고, 30명의 대주교와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7명의 대사들, 교황 대사들 그리고 자유시의 대표자들 등 모두 20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의회는 루터에게 지금까지 그가 주장해 온 사상들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루터는 24시간의 여유를 요청하고 무엇을 철회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하며 곰곰이 따져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의회 앞에서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슬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재판정에서 당당하신 모습의 원조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도, 안나스 앞에서도,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헤롯 왕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재판하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재판하는 이들은 죄인이고, 재판받는 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중에 우리 삶에 대하여 평가받을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 시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살기를 원했던 윤동주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맑게 살도록 노력해 봅시다. 죄를 짓지 않도록 힘씁시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를 비춰보도록 합시다. 조금이라도 양심에 저촉된다면 그 자리에 멈춥시다. 조상들처럼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우리를 돌아보도록 합시다. 늘 말씀으로 우리 삶을 제어하도록 합시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양심에 가책이 없도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도록 살기 위해 힘쓴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당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숨겨진 궤적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펼쳐진 그 책에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들을 숨기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간교하게 위장해 왔는지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면을 벗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욥이라고 예외일까요? 욥은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였는데,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물론 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 의를 자랑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그의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욥기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의 잘못은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습니다. 

욥도 그러했다면, 날마다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앞으로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도덕운동가처럼 말하고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욥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자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법정을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네가 의롭다고? 잘못이 없다고? 넌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이 처해 있는 궁극적 수치요, 인생 최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여기 놀랍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구원의 은총>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유죄 판결을 각오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뜻밖의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 판결이란 <넌 죄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상을 참작하여 석방한다.>는 것입니다. 유죄이지만,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란 무엇일까요? 그 정황이란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씻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죽게 될 때 우리를 변호하는 분이 계십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이십니다. <하나님, 김 목사는 죄인이지만, 날 의지하여 십자가 보혈을 믿었으니,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저를 변호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풀어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믿는다면 반드시 여러분 모두를 변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었던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감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노래가 되길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욥처럼 버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판결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용서의 판결을 하시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괴롬도, 환난도 심하고, 세상 사람들은 모여 진동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용서와 구원의 판결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 억울한 일도 보상받고, 죄도 용서받고, 삶을 지탱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나아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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