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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신 10:17-19, 행 2: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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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신 10:17-19, 행 2:35-37)
  
요즘 봄이 왜 짧은지 아십니까? 여름, 가을, 겨울은 다 두 자인데 봄은 한 자 밖에 없어서 짧다고 합니다. 실재로 요즘에는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씨가 춥다가 갑자기 더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봄이 실종되었다는 말도 합니다. 
  
우리말에는 한 자가 굉장히 강력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깡’, ‘뻥’, ‘짱’ 등 한 자로 말하지만 그 의미는 굉장히 강합니다. 또 요즘에는 젊은이들은 긴 말 보다 짧은 말을 많이 쓰고 축약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강력한 단어가 무엇일가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 자인 “주”입니다. “주여”라는 한 마디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주여”는 구원 받은 자의 고백이며 외침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다가 물에 빠져 들어가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에 물이 잠기게 되자 제자들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주여”, 이 한 마디를 들으실 때 주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라고 하고, 신약의 헬라어로는 ‘퀴리오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야훼’를 대신했던 말이 ‘아도나이’입니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말인데 얼마나 강력한 언어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주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메시야가 되십니다. 무엇을 통하여 메시야가 되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최악의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금광석을 불로 연단하여 비로소 순금을 뽑아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연단하신 후에 순금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강한 군인을 길러냅니다. 특별한 자신만의 특기를 가진 기술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학문에 능한 학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깊은 학문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혹독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주,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됩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성령강림과 방언의 후속으로 베드로가 말씀으로 처음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방언은 성령강림의 상징이며, 말씀은 성령강림의 결과입니다. 성령강림을 받은 군중을 상대로 성령강림을 설명합니다. 그 설명의 결론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 성령의 충만이 아니면 예수가 주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 외에도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9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 설교가 예수가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설교의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부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 참 메시야 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없으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도 될 수 없고,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구원하심을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도행전 2:36에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신명기 10:17에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주’란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하고, 위엄의 존재나 일반적인 주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이런 존재들 가운데 유일한 ‘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 되시는 길이었습니다. 로마서 14:9에는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자가 되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십니다. ‘퀴리오스’란 헬라어 단어는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입니다. 34절에는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입니다. ‘70인역’이라는 성경에는 여호와란 말을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와 예수님을 동일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초대교회의 가장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고 보았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씀을 통하여 ‘주’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며, 그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음’이 곧 구원입니다. 
  
지난주간 수요일 새벽에 제가 4시 30분경에 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화장실에 갔더니 분홍색 봉헌봉투가 있었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누군가가 인쇄된 편지를 넣어 두었습니다. 교회 봉헌봉투 여럿이 이곳저곳에서 30개 가까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심지어 개인 봉헌함에도 넣어 두었습니다. 교회의 십일조, 감사, 생일감사 봉투에 넣어둔 편지는 ‘사랑하는 담임목사님께’라고 시작하는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교회 청년 박00이라고 소개한 편지는 어머니가 권사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10년 이상 다녔는데 자신에게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고 신천지의 이만희에게 가서 설교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서 계시록의 천당과 지옥 설교를 듣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계시록 설교를 안 하느냐고 했습니다. 계시록을 모르면 천국에 갈 수 없는데 목사님은 많은 성도들을 구원받지 못하는 지옥에 데려가려고 하나요 라고 하였습니다. 천국과 지옥과 계시록을 설교시간에 풀어주지 못하면 목사님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은 거짓이며 교회를 치리하기 위해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전부 알리고 다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천지의 새로운 수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께’라고 하면서 저에게는 주지 않고 왜 화장실에 두었지요? 제가 항상 화장실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에 나온 지 10년 된 권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계시록을 알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알아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계시록을 말하고,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단의 수법입니다. 이단은 종말론을 강조하여 위기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25에는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다른 사람이 다 잘 때에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마태복음  13:39에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라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 밤에 가라지 같은 편지를 뿌리고 간 자는 원수입니다. 마귀입니다. 그들은 자칭 추수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가장 악질적인 도둑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름 내내 수고하여 농부가 가을걷이하여 놓은 볏단을 차로 몽땅 싣고 가는 도둑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도둑이 가장 악랄하다고 봅니다. 여름 내내 흘린 농부의 땀과 수고를 헛되게 하는 도둑이 가장 악질적입니다. 이렇게 도둑질하는 것은 추수가 아니라 도둑질입니다. 

성경은 추수꾼은 천사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도둑질을 합니까? 우리교회의 아까운 봉투를 많이 축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봉헌에 쓰는 봉투를 그렇게 쓰는 게 추수꾼입니까? 이들은 추수꾼도 아니고 천사도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단의 발호가 극심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구원은 계시록을 잘 알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빨리 목사님을 찾아오세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이런 헛된 사설에 유혹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계시록과 구원을 꿰맞추니 놀라서 현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믿고 구원의 은총과 감격이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놀라운 뜻이 있고,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려고 그렇게 힘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6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그 분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습을 전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자발적 비하’(voluntary humility)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 이름은 간단하지만 그 뜻은 심오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그 직분을 수행하게 한 사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고, 제사장으로 오셨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메시야는 이 세 직분의 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서신에는 ‘예수’라는 단어가 219회, ‘주’라는 단어가 272회,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 중요한 단어인데 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제일 많을까요? 예수님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31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회의는 가장 중요한 교회 회의 중의 하나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다는 중요한 교리가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교리를 채택할 때에 회의에 참석한 인원 318명 가운데 단 5명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교리를 채택하는 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중에 2명만 결국 서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속죄는 우리 각자가 받아들일 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군병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이 때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피는 구원을 상징하며, 물은 변화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도 변화는 원하지 않습니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어디서 구원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이 일을 하십니다. 
  
‘칭의’란 법적인 문제로서 단번에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칭의’ 다음에는 도덕적 진보인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구원과 변화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칭의’와 ‘성화’ 둘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둘 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길은 힘든 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자기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마디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고백이었고, 이 한마디 때문에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9:22에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고 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출교를 당할만한 악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사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목숨을 내놓을 만큼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은 유대인에게는 절대금기 사항입니다. 위험하고 목숨과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것 외에 복음이나 진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복음전파가 아닙니다.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사실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사도행전 9:22에는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개심하자말자 전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에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래서 당시에 복음은 증거하는 것은 순교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다는 말이 ‘마르투레스’인데 이 말은 순교하다는 말도 됩니다. 증거와 순교는 같은 단어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순교의 각오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교의 각오가 있어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결론 

19세기 무명 러시아인이 쓴 ‘순례자의 길’(The Way of Pilgrims)이란 책에는 성도인 한 순례자가 기도를 늘 마음에 품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경위를 소개합니다. 기도를 늘 마음에 품는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이시기에 이 기도가 가능하고 이 용기를 얻습니다. 
  
영성학에서는 ‘관상’(contemplation)이란 말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관상’이란 말은 성소(temple)에 함께(con)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묵상이란 마음을 비워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성소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영성의 주제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변하여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렸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 모두를 얻으신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주님,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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