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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을 통해 영생을 본다 (시 4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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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해 영생을 본다 (시 49:1-20)

저는 목사가 된 다음 하나님의 종이 되어 보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좌절을 겪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인내가 능력이요, 순결이 능력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저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낙심이 되어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이‘죽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면 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라는 말씀은 저에게 생명줄이었습니다. 제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방법이 죽는 것이었고,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였 때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지금처럼 목회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반드시 누려야 할 축복이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허무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한 평생 죽는 것이 무서워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데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살지 않습니까? 죽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으면 끝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처럼 죽으면 끝인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도, 권력을 가졌어도, 명예를 얻고 성공했어도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5절 비방하는 자들이 에워싼다 한들 어찌 두려워하리오. 
6절 재물이 많은 이들을 어찌 두려워하리오.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이런 사람을 보고 비굴하고 열등감을 가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16절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

실제로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7절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9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 

10절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 ...
11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사람을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12절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20절 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사라져 버릴 것을 붙잡고 사는 것이 두려운 일이고,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13절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ㅈ너혀 다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5절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싶어서 안타까와 합니다. 

시 49:1-2 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 
그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명이고 또 하는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 타락한 다음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거두시면서 우리는 영적으로는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영이 죽어 멸망하게 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주십니다.

진정한 생명인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그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죽음 이후를 몰라서 그런 것이지 살아있는 동안이 훨씬 낫습니다. 고통스러워도 영생을 얻을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고 나면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에 얻는 유일한 길이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반드시 우리 영혼은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할 때,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가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올해 8월 [하디 1903 성령한국]이란 집회가 열립니다. 하디 선교사님으로 인해 한국에 부흥이 일어난지 11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디 선교사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부흥을 일으키신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의사였던 하디 선교사는 한국 교인들을 진정 회심케 하려고 애를 썼지만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수양회에서 전할 말씀을 준비하다가 성령을 체험하며 깊은 회개가 터졌습니다.

그 때 하디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성령의 첫 번째 요구는 내 교인들 앞에서 내 과거의 실패와 그 원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하디는 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선교의 결실이 없었던 원인이 자신의‘교만과 강퍅함, 믿음이 부족’한 연고라고 공개적으로 통회했습니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과 교인들에게 충격이었고, 역시 깊은 회개로 이어졌다.   
이것이 죽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죽음이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심하면 전도의 열매, 선교의 열매가 풍성했을 것입니다.

씨가 죽지 아니하면 그 씨 하나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집이나 직장에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자기 혼자입니다.
우리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은 우리가 죽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똑똑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 예수님께서 자신도 살리고 가정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됩니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선교사는 아내 앤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이렇게 말했다.‘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냐와 함께 아시아의 정글로 가서 거기서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죽읍시다." 

그들은 1813년에 버마 량군에 도착 했고 이내 버마의 언어와 문화에 깊이 매료되었다. 6년 후에야 아도니람은 첫 설교를 힐 수 있겠다고 느꼈고, 7년 후에 그들은 첫 번째 회심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성경 전체를 버마어로 옮기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그는 소책자들과 교리문답서, 문법책,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영어 사전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심한 고통을 당혔다. 생전에 두 번 아내를 잃었고 여섯 아이를 앓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계속해서 질병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영국-버마 전쟁 기간 동안에는 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2년여를 쇠사슬과 열기와 오물을 견디며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37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면서 미국의 집에는 단 한 번 왔다 하지만 버마 땅에서 죽고 묻힌 결과 그는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와 앤이 버마에 도착한 1813년 첫 일요일에는 그들끼리만 성찬을 나누었다. 초대할 다른 그리스도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7년 후인 1850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63개의 교회에 세례를 받은 7천여 명의 버마인과 카렌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버마에 3백만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다 순교한 것이 아니지만 타 문화권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순교와 같은 고통입니다. 
가족과 친척들과 헤어지는 것, 안락과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 입맛에 맞는 음식을 포기하는 것, 익숙한 언어사용을 포기하는 것, 개인의 야망을 포기하고 초라한 섬김의 사역에 머무르는 데 만족하는 것이 다 죽음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34년에 태어난 루마니아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 목사님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하에서 비밀 경찰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슴이 터질 만큼 강한 말씀을 주십니다. 설교에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입니다.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며 마귀에게 사로잡힌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믿고 고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호주 골드코스트에 머물 때, 마운틴 템버린에 있는 농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호텔에서 산을 향하여 가는데, 눈 앞에 큰 산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마운틴 탬버린이었습니다. 차는 무작정 산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 길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그 산을 관통하여 지나갔습니다. 산을 지나면서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하며 산다는 것은 엄청난 장벽이 앞에 있다 할지라도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 위로 뛰어 내렸던 베드로처럼 오직 주님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선교완성, 민족 통일,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새벽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기도회를 계속 이끌어가는 것이 산과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도 제목 하나 하나가 다 넘을 수 없는 큰 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약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여전히 6층에서 답답한 가운데 새벽기도회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민만 되었지 변화도 없고 변화되리란 전망도 불투명한 채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당에서 차원이 달라진 기도회가 진행 중입니다.
안되는 것만 보지 않고 된 것을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도 중에 홀로 선교완성과 민족통일, 한국교회 부흥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게 하신 주님께서 선교 완성과 민족 통일, 한국교회 부흥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열어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감격이었습니다.

때때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는 잘 못갈 때도 있습니다. 잘 못된 길이라고 판단되면 다시 가면 되지요!
더 정신 바짝 차리라는 교훈으로 삼으면 됩니다.
안 간 것 보다 100번 잘 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배운 것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후회만 남는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어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할 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그 남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여자가 자신이 택한 남자에게 죽은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여자를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죽는 것도 죽는 나름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은 행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할 생명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낄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드릴 때는 얼마나 황홀할까요?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가 다 밝혀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요?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흥분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볼 때는 어떨까요?
지금 교인들끼리 교제할 때도 감동하고 감사한 일이 있디면, 모든 족속과 언어로부터 온 큰 무리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우리가 지금 마음에 임하신 예수님을 통하여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 할 수 있다.”면 주 예수님을 눈을 볼 때는 얼마큼 기쁠까요?

죽으면 산다! 이것이 확실하고 온전하고 역설적인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뛰게 만듭니다.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죽었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성찬이 형식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었습니다. 분명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두려움, 슬픔, 다 사라집니다. 영생의 기쁨이 누려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을 살기 원합니다. 기도하며 그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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