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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을거리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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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거리 (창 28:10-22)

외계인의 존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외계인의 존재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수한 과학적인 차원에서 우주 어느 곳에 인간과 같은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접촉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과학적 차원을 떠나서 유별나게 관심을 가진 나머지, 외계인과 접촉하려고 애쓰고 심지어 만나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외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머리가 크고 눈이 크면 외계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외계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한 부류를 추가한다면 외계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고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체를 간직한 별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외계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가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인스타인도 이 부류에 속했습니다. 우주와 세상을 누군가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이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와 상관이 없이 저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접촉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신을 만나보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은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네 번째 부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제껏 살면서 순수한 무신론자는 별로 만나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 결론에 부합한 삶을 살 각오가 돼 있어야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용기가 없기 때문에 미신을 믿든, 운을 믿든, 업보를 믿든, 무언가는 의지하려고 합니다. 전쟁터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그 사실을 시사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믿고 신앙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솔직하게 인정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왕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앙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이런 기복이 없는데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다 보니까 의심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만일 의심에 벽에 부딪쳐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지하게 신앙으로 살려고 추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오늘 이곳에 와 앉아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영어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I believe in God’ 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I believe God’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엔 차이가 있습니다. 

‘I believe in God’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이고 ‘I believe God’ 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많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고 두려워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이 그 사람을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believe in God’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believe God’,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것인데 여기에 오늘의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뭔가 꺼리가 있어야 됩니다. ‘꺼리’라는 말은 반찬거리, 대화거리, 소일거리라고 말할 때처럼 무언가 대상,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별 꺼리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건 마치 소가 닭 보듯 하는 것입니다. 판문점에 가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측과 북측의 군인들이 서로 노려봅니다. 대화 한 마디 하지 않고 어느 한 사람 건너가지도 않고 건너오지도 않고 서로 망원경으로 상대방을 응시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는 판문점에서 서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꺼리를 제공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에요. 사람이 스스로 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과도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야곱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요, 애매한 분이에요. 꺼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길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야곱에게 드러내십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 사닥다리가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닥다리가 땅에 있고 하늘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 사닥다리가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일방통행이 아니에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왕래가 이루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반드시 말씀이 수반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상은 말 못하는 돌덩어리, 나무토막입니다. 거기에 절을 하는 인간이 미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누구에게 드러내시든 반드시 말씀이 따라왔습니다. 사무엘에게 계시하실 때도, 엘리야에게 계시하실 때도,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도, 바울에게 나타내실 때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왔습니다. 만일 그게 아니고 우두커니 쳐다보고만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무슨 말씀이 나올까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입에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말이 나올까, 우리를 꾸짖는 말씀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두려워 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내 죄를 꾸짖으실 것이다 .’ 평소에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두렵겠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얼마나 불신하면 여전히 죄로 인해서 스스로 벌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마치 어른이 손을 들면 자기를 때리려는 줄 알고 움츠리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얼마나 맞아 버릇했으면 누가 손을 들면 때릴 것으로 생각한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축복하시려고 손을 들 때 때리려는 줄 알고 움츠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을 더 멀리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구체적인 꺼리에요. 이것이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만일 이러한 내용이 없는 사람은 그의 믿음은 콘텐츠가 없는 것입니다. 공허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은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근거로 하여 믿었습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노아가 그 예입니다. 노아에게는 하나님이 홍수를 경고하셨지요. 아브라함에게는 기업으로 줄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인물들은 그들의 신앙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그들이 믿는 구체적인 믿음의 꺼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이제껏 하나님은 그에게 간접적인 존재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델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비로소 야곱에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구체적으로 대답할 내용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할 할 것입니다. ‘내가 누웠던 땅을 나와 내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는다. 나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을 믿는다. 땅의 모든 족속이 나와 내 후손을 인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고향에 돌아올 때까지 함께 해주실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다.’ 구체적인 믿음의 고백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왜 세상이 크리스천들을 무시하느냐? 믿는다고 말만 할 뿐 구체적인 내용도 확신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콘텐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성이나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을 거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냐? 

첫째로 그런 계시를 얻기 위하여 다 계룡산에 올라가야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 성경책 전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할렐루야! 어떤 특별한 다른 계시를 기대하기 전에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믿어야 됩니다. 만일 마지막 심판 자리에 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 나는 주님이 나에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주님이 ‘성경이 나를 증거하지 않았느냐? 

성경이 이미 나에 대하여 증거하거늘 네가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만일 심판 자리에서 누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이 성경이 나의 선함과 인자함을 너에게 증거하였거늘 네가 그것을 읽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도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기록된 성경말씀을 건너 뛴 채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직통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성경에 기록돼 있는 내용을 들은 경우가 많아요. 

두 번째로 이 성경책이 좀 더 여러분에게 가까이 확실하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는 묵상을 해야 됩니다. 묵상! 제가 설교 거리를 얻는 비결도 성경을 묵상함으로써 떠오르는 지혜를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글로 기록된 성경을 우리의 마음속에 조명하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조명이고 성령의 조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세 번째는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계시가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분명해 집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 하나님도 아담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지만 아담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서로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상식적인 것입니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던 어떤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공부도 잘 하고 신앙도 좋은 젊은이들이었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구하기 위하여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원을 떠나기 전에 이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동안 기도하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서로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나눈 말 중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70년대 말에 일어난 일입니다. 첫째는 장차 대한민국은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런 응답을 받았고 둘째는 중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된다, 셋째는 남북이 통일될 텐데 중국의 도움을 받아서 통일된다고 하더래요. 이것이 이 청년들이 받은 세 가지 영감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70년대에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중국이 세계 최고의 파워가 된다고? 중국을 통해서 남북이 통일 된다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들은 그 약속을 믿었고 그 중에 한 명은 자기 친구들은 전부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자기는 장치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워야 된다고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과연 그들이 옳았는지는 지켜봐야 됩니다마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는 사실이에요. 

아마 여러분 중에 가족이 여러분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마 여러분은 궁금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그리고 좀 언짢아하는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만 만나라고 한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무슨 경천동지할만한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아주 신비한 현상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는 얘기인데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당신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모양을 보여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당신을 나타내셨을 때 말씀을 하시고 약속을 하신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게 하신다는 말이에요.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주의 음성을 들어보면 사랑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말미암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받을 때 우리에게 비로소 믿을 거리가 생기는 것이고 ‘Believe in God’ 뿐만 아니고 ‘Believe God’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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