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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치는 자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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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6년 11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3 외치는 자의 소리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 3:1-3)

 
우리는 지금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듣고 있다. 지난 주에 광화문 광장에서 60만명이 촛불을 들고 함께 부르는 애국가 떼창소리가 있었다. 평소 모의고사를 준비할 시간에 거리에 나와 자유발언을 하는 여고생의 당찬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어제는 밭을 갈아야 할 시간에 서울로 가는 도로 한복판을 이어 달리는 트랙터 소리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한 목소리로 나라를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소리의 실체는 다 다르지만 그 소리가 전하는 메세지는 하나다. 나라를 위한 최선의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천년 전 광야에서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이었다. 그 때 그가 무슨 소리를 외쳤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이 언제 사역을 시작했는지 나온다. 눅 3:1-2,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디베료 황제는 로마의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다. 그의 통치 열다섯 해는 AD 26년이다. 그 해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하던 해다. 그 때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골란 지역은 헤롯 빌립이 분봉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는 가야바가 공식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실세는 그의 장인 안나스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나스를 실제적인 대제사장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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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통치가 강화되고 각 지역에는 로마에 충성할 지도자들이 세워졌다. 유대 백성들에게는 성전세와 십일조 외에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과 조공을 더 내야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권력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지위를 확장해갔다. 바리새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자신들을 분리시키며 율법을 지켜내기 원했지만,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종교인이 되어갈 뿐이었다. 간간히 일어났던 민중들의 봉기는 로마와 헤롯의 군대에 의해 힘없이 꺾기기만 했다.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그래도 자신들을 채찍질하며 인도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지도 430년이 지났다. 유대 땅에는 깊은 시대의 어둠만 이어지고 있었다.


말라기 선지자는 430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 구약 마지막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유대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언제 나타날지 궁금해 했다. 그것만이 당시 힘없는 유대백성들의 간절한 기대였다.


당시 세례 요한의 시대에 왕과 종교지도자들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마땅히 백성들을 위해 일하라고 세워진 자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절망만 가져다 주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힘있는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빈 들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세례요한을 통해 시작된다.

 

예루살렘 남쪽에 가면 세례 요한을 기념하는 광야 수도원이 있다. 참 고요한 곳이다. 요한은 이 빈 들에서 세상의 소리를 단절하고 하나님을 기다렸다. 침묵속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라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요 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의 외침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회개는 감정적으로 뉘우치는 참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적인 회개의 개념은 ‘테슈바’다. 그것은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말라기서 3장 7절에서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이 시작한 세례는 단순한 정결의식이 아니었다.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 였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대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실 수 없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외쳤다. 여기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천국은 ‘말쿠트 하샤마임’이다. 영어로는 ‘Kingdom of heaven’인데 마태는 유대인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하나님이란 단어 대신에 하늘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은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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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역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두번째 세례 요한의 외침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다.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현장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나타났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했다. 독사 중에는 자기 어미의 자궁을 먹어치우며 태어나는 독사가 있다고 한다. 자기 어미를 죽이고 태어나는 것이다. 요즘이야 욕이 많이 발달했지만 ‘독사의 자식’이란 표현은 당시 할 수 있었던 제일 강한 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세례 요한은 종교적 위선와 현실적인 야망으로 가득한 그들을 직면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에게 선민의식을 버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돌들은 히브리어로 ‘아바님’이고, 자손은 ‘바님’이다. 아바님으로 바님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슷한 운율의 단어로 워드플레이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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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침례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만 요구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침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도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확실한 결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말했다.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러자 무리가 질문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 세례요한이 답한다. 눅 3:11,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무리가 부자라서 나눠주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가 없는 중에도 이웃과 과부를 돌아보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라는 말이다.


세리들도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한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초과 과세하여 남은 것은 자신들이 챙겼다. 그래서 세리는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죄인의 대명사였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은 말한다. “부과 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


군인들도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한다. 그들은 로마가 수리아에서 모집한 비유대인 지원군이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거나 거짓으로 고소하여 이익을 챙겼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이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3) 그는 폭력 혁명이 아니라 사회 계층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너무도 카리스마 있는 세례 요한에게 매료됐다. 그래서 그를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부인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친다. 눅 3:16-17,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사역은 자신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가리킨 것이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는 자신의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가 그의 부르심으로 받은 이사야서 40장 말씀을 좀더 살펴보겠다.


사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고대 왕의 대로는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정비되어야 했다. 높은 곳은 깍고 패인 곳은 메꾸어 평탄하게 만들어야 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말해야 하는 내용은 너희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래 있었던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떠돌던 곳이다. 이 방황이 끝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려면 광야문제가 먼저 해결되야 하는 것이다. 낮은 곳을 돋우고 높은 곳을 깎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광야에 하나님의 대로를 놓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오실 수 없는 영적인 걸림돌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그러한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높아진 마음과 죄로 깊이 패인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요한이 외쳤던 외침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값싼 은혜가 아니였다. 그가 전한 구원은 당시 관행처럼 행하던 죄와 불의를 끊고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서겠다는 분명한 결단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었다. 그것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오실 수 없는 삶의 지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일주일에 교회 한 번 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세상에서는 불의와 편법을 관행을 따라 저지르며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사야서 40장 6절 이하에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사 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자리와 재물이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아래 그들의 제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어떠한 지위와 권력도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면 풀처럼 마르고 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외치는 소명을 받았기에 어떠한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하던 헤롯 안티파스의 씨크릿 가든을 폭로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본처를 버리고 이복 형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책망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 일로 세례 요한을 마케루스의 감옥에 가두고 나중에 그를 참수한다. AD 28년경 세례 요한은 외치는 소리가 되라는 그의 사명을 다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럼 헤롯 안티파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8년 뒤인 AD 36년 그는 나바테안 왕국의 왕 아테타스 4세의 공격을 받는다. 이 왕이 바로 헤롯에 의해 쫒겨난 아내의 아버지였다. 그는 헤롯의 영지였던 베레아를 침공하여 헤롯 안티파스의 군대를 박살낸다. 딸이 당한 수모를 앙갚음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것이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3년 뒤인 AD 39년 헤롯 안티파스의 새 부인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로마에 가서 분봉왕이 아니라 왕의 직함을 얻어오라고 볶아댄다. 그래서 그는 당시 제 3대 로마황제인 칼리굴라에게 간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의 비리가 드러나 분봉왕의 직위마저 박탈당한다. 그는 결국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 지역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죽게 된다. 여자를 잘못 만나 너무도 허망하게 인생을 끝낸 것이다.


권력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국민이 알게 된다. 요즘 세월호 노래 가사처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권력의 힘이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과 부는 대통령과 정부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 가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법과 온갖 특혜가 가진 자들을 위해 베풀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힘없는 국민들은 이러한 질서를 거스르지 못하고 순응한 채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와 사회에서 교회인 우리는 무엇을 외칠 수 있을까?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아 공회 앞에 세웠을 때 그들이 외친 말이 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 오늘날 교회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를 축복해주면서 거기서 유익을 누려는 안 된다. 풀과 같은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하나님 말씀 앞에 떨라’고 외쳐야 한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이 그들 인생에 찾아가실 수 있도록 마음의 대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이 묻힐 때가 있다.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싫어할 때가 있다. 암 5:10-13,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지혜자가 침묵할 때가 있다. 우리 역시 침묵할 때가 있다. 몰라서 침묵하고, 알지만 침묵하고, 분노하며 침묵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귀를 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실 때 우리는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가 오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광야와 같은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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