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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진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이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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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이 1:7-9)

: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강의를 하다가 돌아서서 칠판에 글씨를 쓰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수님의 바지가 뜯어져서 그 안에 다른 색도 아닌 빨간 팬티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에 교수님이 돌아서니 학생들은 웃음을 참았습니다. 다시 교수님께서 흑판에 글씨를 쓰기 위해 뒤를 돌면 학생들은 참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교수님은 ‘내가 뒤를 돌아서면 누군가가 다른 학생들을 웃게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답니다.

“웃는 놈들도 나쁘지만, 웃기는 놈이 더 나빠!”

교수님이 말씀한 웃기는 놈은 바로 교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웃기고 있으면서 웃기는 놈은 더 나쁘다고 자신을 욕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교회를 보고 웃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이 세상을 웃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을 향하여 웃기는 놈이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이 세상을 웃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웃음이 없는 세상에 즐거운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는 비웃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거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은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서툴러도 서로 사랑의 몸짓을 따라해야 합니다. 비바람이 치는 폭풍우 앞에서 촛불 한 개를 켠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안에 계신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르기에 세상에서 웃기는 놈이 아니라, 세상을 웃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이유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혼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흐리는 혼란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별된 행동이 필요합니다.

  
I. 혼란
  
진리를 흐리게 하는 어떤 혼란이 있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혼란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사도 요한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이유를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자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는 말씀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부인하다’는 말은 ‘아니다’라는 말과 ‘인정하다[oJmologevw/호몰로게오]’는 두 단어로 연결된 말입니다. 즉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1. 부인하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영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자는 이 세상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나누고, 영적인 것은 거룩하고 육적인 것은 속되다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a)고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과 육은 대립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과 육을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극단적으로 영은 영광스러운 것이고 육은 저주스러운 것이 됩니다. 모든 육적인 것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까지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잠시 동안 나사렛 예수에게 들어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떠나가셨다고 해괴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경의 사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2 말씀입니다.

(요일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체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사람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 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습니다. 또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지닌 사람이 되신 것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셨습니다(히 2:14).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부인하게 되면 육체를 가진 인간이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육체를 가지셨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가리는 다림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인하면 다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오신 것을 믿는 것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으로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도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을 지나치게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영혼을 고귀하게 여긴 나머지 육체를 함부로 굴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소중하게 여긴다면서 몸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영혼을 고귀하게 여긴 나머지 이 세상에서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데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으로 사는 일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사람은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셨다는 것으로 믿기에, 자신의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도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하려는 말씀은 ‘미혹’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실체는 미혹하는 자입니다. ‘미혹하는[plavno"/플라노스]’이라는 ‘길을 잃게 만드는 자’, ‘속이는 자’,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자’입니다. 진리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굳세지 못한 성도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그들을 속여 진리에서 탈선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미혹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습니다. 사도들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도 많습니다.

탁지원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에 따르면 국내 소종파 지도자 중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만 20여 명,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경우가 5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 하나님의 부인이나 보혜사 성령, 혹은 성경 속 인물인 엘리야나 다윗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지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채 백 년이 되지 못하여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1 말씀입니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예수님께서도 이미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사도의 시대나 오늘이나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있었고, 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단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바른 믿음을 지키고 간직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가까이에서 이단들이 들끓지 않는다면 이런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단들에게 감사하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때문에 바른 신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혹하는 자들의 정체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주목하려는 말씀은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요즘 인터넷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안티크리스토스[ajntivcristo"]’ 즉, ‘안티 그리스도’입니다. 요즘만 안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안티가 있었습니다. ‘안티’라는 말은 ‘반대하다’, ‘대적하다’는 말입니다.


3. 대적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사탄이거나 그 하수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분명하게 경고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3입니다.

(요일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적그리스도의 정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이단들을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일은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것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헐뜯는 것도, 단지 목적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란의 시대가 아닌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항상 조심하여야 합니다.

  
II. 조심
  
이어지는 말씀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삼가다[blevpw/블레포]’는 말은 기본적으로 ‘보다’는 말입니다. 또는 ‘생각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유의하라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조심하여야 합니다.

1. 스스로 조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5:8 말씀입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가 말씀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하여야 할 것은 그들이 뿔을 달았거나, 사자의 갈퀴를 펄럭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1:14).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삼가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2. 완전히 헛수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여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속임수에 넘어가게 되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헛수고가 됩니다. 이단을 따라가는 것은 전도자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 값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저주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온전한 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상을 받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온전한 상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열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하여 진리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삼가 조심하여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에 관한 것입니다. 

  
III. 자리
  
우리가 삼가 조심하여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 입니까? 우리가 듣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9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9a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오늘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즉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나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나치다[proavgw/프로아고]’는 말은 ‘앞으로 이끌다’는 말인데, ‘너무 나가다’(NASB, goes too far), 또는 ‘앞서 가버리다’(NIV, runs ahead)는 말입니다.

1. 교훈에서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모자람과 같다(過猶不及)’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면 큰일이 납니다.

어느 방송에서 어느 의사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채소 값은 하늘로 치솟고, 정육점들은 문 닫을 판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다른 분이 나와서 적당량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방송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지나침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나침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영적인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 무엇보다도 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서 지나쳐서 영만을 중시하게 되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육신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쾌락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믿음에서 지나쳐 우리가 순종하여야 할 행동을 무시하게 되면 ‘은혜주의’가 됩니다. 그 반대로, 믿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행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이단들도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것을 무시하고 자기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한다며 귀신 좇아내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것은 ‘귀신놀음’에 빠진 것입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의 많은 내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를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맹종하여 ‘보혜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숭배하는 잘못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판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목사를 ‘먹사’라고 욕을 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나치는 극단은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렇다고 적당주의자가 되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9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9b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2.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다른 이름은 ‘캐논(canon)’입니다. 이것은 본래 갈대를 뜻하는 것으로, 갈대가 각종 측량 작업을 위한 막대기 자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기준이 되는 척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서 지나치지 말고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일부 말씀만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말씀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성경을 자신의 생각을 위하여 꿰어 맞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나간 이단들이 말씀을 이용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성경을 자기의 생각에 꿰어 맞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꿰어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뜻을 묻고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미혹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서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천지이면서 신천지가 아닌 척하고 지금 예배당에 앉아있는 사람은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거짓의 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머물러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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