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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 6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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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 64:1-10)       

1993년에 크게 흥행했던 <도망자>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시카고의 저명한 외과 의사 <리처드 킴블>은 시카고 근교에서 아내와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가한 그는 집안에서 괴한과 마주쳐 격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괴한은 도망했지만, 아내는 이미 그의 손에 죽은 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졸지에 아내 살해범으로 몰리게 됩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고 그와 다른 죄수들을 태운 버스가 교도소로 향하던 중 몇몇 죄수가 탈주를 시도하는 바람에 버스가 전복되고, 마침 지나가던 열차와 충돌하는 틈을 타서 극적으로 탈출을 합니다. 연방 경찰 <샘 제라드>는 끝까지 킴블을 추격하고 킴블은 도망하면서 진범을 찾아 헤맵니다. 그 후 피를 말리는 쫓고 쫓기는 과정이 전개 됩니다. 결국 나중에 집안에 있던 괴한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그를 배후에서 조종한 진짜 주범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주범은 놀랍게도 가장 가까웠던 동료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영화 내내 관객들은 주인공이 붙잡히지 않고, 진범을 밝혀내길 기대하며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주인공의 고통의 원인은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아내를 잃은 상실감입니다. 둘째, 누명을 쓴 억울함입니다. 셋째, 그 곁에 아무도 없는 데서 오는 고독입니다. 넷째, 언제 잡힐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데서 오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이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4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표제어에는 아무 힌트도 없기 때문에 이 시가 어떤 상황에서 지어졌는지 알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이 시의 내용과 분위기를 통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기는 상황에서 지었을 것이라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시와 앞에서 말씀드린 영화의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주석가들의 의견대로 이 시가 압살롬의 반란 사건 와중에서 지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선 다윗은 억울했습니다. 아들에게 왕궁과 왕좌를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도망하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가담하여 다윗 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자신을 단수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라고 했는데,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지 않고 <내가 근심하는>, <나의 생명을>이라고 단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의 고독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의 곁에 신하들과 일부 병사가 있기는 했지만, 위기를 만나면 누구나 곁에 사람이 있어도 마음은 외로운 법입니다.
 
반면에 적들은 숫자가 많았습니다. 2절 이하를 보면 다윗의 적은 <그들>, <우리> 등의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가장 아끼는 아들 중 하나였고, 가장 잘 생기고 리더십이 뛰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반란에는 제갈량처럼 뛰어난 전략가인 <아히도벨>도 가담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몰려오는 것을 사무엘하 15장 12-13절이 잘 보여줍니다.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 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게다가 다윗은 갑자기 당하여 아무 대책도 없는 반면에 적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적들은 묘책을 세웠습니다. 음모는 치밀하게 진행되어 다윗을 꼼짝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를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2절에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이라고 했고, 5절은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압살롬은 반란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6-7절을 보면 그가 서서히, 완벽하게 준비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무려 사 년 동안 음모를 꾸미고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지만 다윗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을 당하여 다윗은 황급히 왕궁을 버리고 도망하게 됩니다. 그가 황급히 도망하는 모습이 사무엘하 15장 14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그는 마치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에 맞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4절을 보면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숨어서 쏘는 화살, 그것도 예고 없이 갑자기 쏜다면 더더욱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황급히 성을 벗어나 도망하는 다윗,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도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온갖 말로 비웃고 독을 뿜으며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3절을 보세요.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 독한 말로 퍼부은 사람 중에는 <시므이>도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사울 왕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이 자기 잘못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윗 때문에 사울이 몰락한 것처럼 여기고 다윗을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쫓겨 가는 것을 보고 따라오면서 독한 말로 비방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그의 비방은 근거없는 악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때 다윗에게는 아직 시므이 정도는 처단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절 시므이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다 가라앉아 있었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앞의 영화 이야기나 오늘 읽은 시편을 다윗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 본 느낌이 어떠합니까? 이 이야기들은 영화 속의 가상현실이거나 다윗에게만 일어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 갑자기 만나는 일,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이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고독하게 되는 일,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비방하고 독을 뿜어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고통.......이것이 어찌 우리에게는 없겠습니까? 

한 상담심리학 책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 현상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살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결정적인 것은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방이 다 막혀 나갈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상황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렇게 몰리는 딱한 이들을 제법 만나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직장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제 한 친구는 근무하는 연구실의 비리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한 이유로 왕따를 당하다가,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연구실 동료들에 동조하자니 양심이 죽고, 끝까지 버티자니 회사 차원에서 진행되는 음모에 맞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업에 실패합니다. 실패하고 나니 돈만 잃는 게 아니라, 사람도 잃게 됩니다. 잘못이라곤 단지 판단착오로 잘못 투자한 것일 뿐, 의도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중병의 진단을 받는 것도 인생들이 경험하는 치명적 아픔입니다. 말기라는 진단을 받을 때, 치료 방법이 별로 없다는 말을 들을 때, 갑자기 고독해지고 허무해집니다.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이 심장에 박힌 사람처럼 고통을 느끼며 쓰러집니다. 허둥대느라고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안에서 가장 유력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던 어떤 교인이 다른 교인들의 재산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도산했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교회에서 수십 가정이 동시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은 교회에 화재가 나서 예배당이 전소되었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교회는 망조가 들었어. 하나님이 버린 거야. 그 목사가 분명히 뒤에서 무슨 나쁜 짓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하나님의 심판이야......>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반박할 기운조차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도님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일들이 없으셨습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자신의 생애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이 시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이 시의 결론과도 같은 맨 마지막 절인 10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할렐루야!  마지막 절은 앞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즐거워하며>, <자랑하리로다> 등의 단어는 앞의 우울하고 힘든 분위기와 다릅니다. 이 시는 그 안에 급격한 반전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전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괴로워하던 시인은 어떻게 즐거워하게 되었습니까? 반전의 근거는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때 깊은 고통에 빠진 시인은 상황에 맞설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는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화살 한 대만 더 맞으면 절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그의 적을 쓰러졌습니다. 

구원의 화살을 쏜 이는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7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아멘! 하나님은 아슬아슬한 상황에 등장한 구원자입니다. 7절 첫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그 앞 6절까지는 수많은 적들이 음모를 꾸미고, 갑자기 화살을 쏘아대고, 독한 말로 비방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시인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심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셨습니다. 여기 <쏜다>는 단어는 4절의 시인의 적들이 쏜다고 할 때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쏘신다고 할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주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갑자기 화살을 쏘았느냐? 나도 너희에게 갑자기 화살을 쏘겠다. 어디 맛 좀 보아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인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인을 도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인이 악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는 상황에 적용하여 생각한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좌를 쟁탈하는 것, 심지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리는 것, 아버지의 후궁들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패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칼을 빼든 압살롬을 징벌하기로 결정하고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요? 화살에 맞은 채로 쓰러진 채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1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아멘!  그는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근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 근심이란 단어에는 절망의 잿빛만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의 푸른빛도 함께 있습니다. 

<근심>이라고 번역된 <베시히>란 히브리어의 원형은 <시아흐>입니다. 그런데 이 <시아흐>는 근심, 불평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아래는 전혀 다른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놀랍게도 <묵상, 기도>로도 번역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단지 근심만 하는 게 아니라, 근심을 디디고 기도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흠정역성경(KJV)은 이 단어를 <기도, prayer>로 번역했습니다. 또 <새예루살렘 성경, NJB>은 <간청, plea>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호소>라고 번역했습니다. 

시인은 근심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심을 기도, 간청, 호소로 승화시켰습니다. 근심이 깊어질 때, 기도도 깊어졌습니다. 둘러싼 환경이 그를 칭칭 감아 깊은 물속으로 끌어내릴 때,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더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의 기도는 2절에서도 이어집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아멘!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시인의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셨고, 그들을 쓰러뜨리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음모에서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다윗이 황급히 왕궁을 빠져나가던 날, 아히도벨은 즉시 다윗을 추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대로 했다면, 다윗은 붙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잘 준비해서 천천히 추격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는 <후새>의 뜻을 따름으로써 다윗에게 전열을 정비할 틈을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음모에서 다윗을 건지신 것입니다. 그 후 다윗은 전열을 정비하여 반란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결국 이 시는 슬픔에서 즐거움으로, 패망에서 승리로 반전되어 마무리됩니다. 이 엄청난 구원을 체험한 시인은 다짐합니다. <내 삶의 즐거움은 여호와 밖에 없다. 이제부터 나는 그 분께 피하고, 그 분의 이름만 자랑하리라>고 결심합니다. 그것이 10절 말씀입니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할렐루야!  여기서 <자랑하리로다>라는 단어에는 <할랄>이란 원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이 시인처럼 구원을 받게 되길 원합니다. 누가 진정한 신앙인일까요?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랍비는 종종 인근 마을로부터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거나 기도하러 가곤 했습니다. 그는 그 때마다 단골 마차를 이용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마부와 여관에 함께 묵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랍비와 마부는 함께 아침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마부는 숙련된 속도로 15분 만에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한 시간이 되어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마부에게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빨리 마칠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예, 랍비님은 기도 외에도 많은 책을 읽으셔야 하고, 탈무드도 공부하셔야 하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급할 때든지 힘들 때든지 오직 기도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탈무드나 많은 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도하는 데는 랍비님보다는 더 빠르고 숙련되어 있답니다!> 

 여러분, 수많은 신앙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하고, 신앙에 필요한 상식을 많이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에 익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데 숙련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익숙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숙련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근심 중에서도 기도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잠시 후에 우리는 다음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우리 모두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어렵고 힘든 인생길을 즐거움과 감사로 걷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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