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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이름과 피해야 할 새의 잔치 (계 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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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과 피해야 할 새의 잔치 (계 19:11-21)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신랑되신 주님의 신부로 서게 되었으니 복 받은 일이다. 그런데 계19:14을 보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 그를 따르더라.”고 하였다. 그 분은 누구이고 군대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그 분은 신랑 주님이시고 군대들은 신부 성도들이다. 지난 시간에 간단히 보았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 보자. 계19:11~16을 보면 그 분은 백마와 백마를 탄 자이다. ‘백마를 탄 자’란 여기서 백마가 계6:2에 나오는 전쟁을 가져오는 활을 가진 자가 타고 있는 백마가 아니고 정결과 승리를 가져오는 주님이 타고 있는 백마로서 당당하게 오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 시 백마는 눈에 잘 띄게 된다. 공격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타지 않는 것이 백마인데 이기고 나면 백마를 탄다. 그 타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은 종료된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기신 그 분이 우리의 신랑이시다. 

그 분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예수,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알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름이 네 가지로 나오고 있다.   

1. 주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계19:11에서 그 이름을 왜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는가? 물론 하늘이 열린 것을 볼 때 요한이 본 내용이기에 따질 이유가 없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신부와 맺은 관계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주님의 마음을 담아낸 이름이다. 예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과 시대에 따라 언약을 바꾸고 무효화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변함없으시다. 즉 충신이란 말은 ‘신실하다’는 것으로 언약을 결코 깨지 않는 분임을 말한다. 주님을 믿어도 된다는 말이다. 믿을만한 분이고 믿어야 되고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충신과 진실의 이름을 지닌 주님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2. 주님의 이름은 자기 만이 아는 이름이다. 

계19:12에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라고 하였다. 어디에 이름을 쓴 것일까?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이 써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많은 관들’ 즉 많은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란 말이고 이 권세는 알 자가 없는 권세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머리 둘 곳 없는 약자, 아무런 권세도 없는 업신여김을 받은 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실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알 수 없는 이름, 그것은 주님의 권세, 구원과 능력, 심판의 권세자란 이름인데 알 자가 없는 이름의 권세이다.

암행어사 마패를 지니고 나타난 이도령, 세상은 그를 모른다. 거지로 안다. 나그네로 안다. 허나 이도령은 자기만이 안다. 마패를 들고 호령하는 날에 되어질 권세를 자기만이 안다. 우리 주님의 권세는 놀라운 권세이다.

3.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름이다.

계19:13 주님은 또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라고 했는데, 피 뿌린 옷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는 성육하셔서 그 몸으로 피를 흘리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계시자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는 대언자요, 죄 지은 인생들에 대한 대속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이신 로고스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것이 계시된 말씀이므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에 주의하라. 예수님은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옷에 피가 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주님, 적그리스도와 그 군대에 대한 용서없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사63:6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심판의 피 뿌린 옷,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심판이 이루어지고 진행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시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심판의 날이겠는가?  

4. 주님의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다.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주님은 초림 시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빌2:7~10을 보면 가장 낮은 자로 오셨다. 그러나 복종과 순종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예수는 우주 만물을 그 손에 장악하고 계신 왕의 왕, 주의 주이시다. 이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 나의 신랑이시다.

그러므로 신부된 우리는 오직 그를 따르고 그 분만이 내 삶의 전부이시다. 신랑 주님이 백마를 타고 오시니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계19:8)는 이제 그를 따르는 군대가 된다. 사랑의 예수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분으로 오시니 우리는 당연히 그 분을 따라가는 군대가 된다.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신부는 신랑을 따른다. 신랑이 주방장이 되면 신부는 식순이가 된다. 신랑이 호아제가 되면 신부는 황후가 된다. 신부는 신랑이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동행자가 된다. 공중의 혼인 잔치에 서게 된 성도들이 하늘 군대가 된다.

① 계16:16에서 처음으로 아마겟돈 전쟁이 나왔다.

② 계17:14에서 이 전쟁은 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성도가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왕과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③ 그 마지막 전쟁이 묘사되는 계19:15을 보면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친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린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 

왕 중 왕이시고 만 주되신 주가 가진 검과 철장과 진노의 포도주 틀을 피할 자 누구인가? 그리하여 적그리스도의 세력, 그리스도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새의 잔치에 먹잇감이 되고 만다.

새의 잔치란 무엇인가? 죽음의 잔치, 참여해서는 안되는 잔치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는 복된 잔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적하고 예수를 대적하는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새의 잔치에 들어간다. 잔치는 잔치인데 축제의 잔치가 아닌 저주의 잔치이다. 계19:17~21의 새의 잔치는 하나님의 잔치에 모여 새들이 배불림을 얻는 잔치이다. 새의 먹잇감이 되는 죽음의 잔치를 보라.  

1) 계19:18 - 적그리스도를 따른 모든 사람들, 왕들, 장군들, 장사들, 말들, 말을 탄 자들, 자유인들, 종들, 작은 자, 큰 자, 모든 자의 살을 새가 먹는다.  

2) 계19:20 -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두 짐승이 모두 잡힌다. 이들은 미혹자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 두 짐승은 산 체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  

3) 계19:19 -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 분과 그의 군대와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재림의 예수를 향해 덤벼드는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 지상 최후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이다. 스가랴 서를 보면 이때 세계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집결한다. 여기서 온 땅의 2/3는 멸절하고 1/3은 거기 남는다.(슥13:8) 정말 이때 주님이 그 환난의 때를 감하여 주지 아니하면 구원 받을 자가 없다.(마24:22) 주님이 그래도 감해주신다. 슥14:3~4에 의하면 감람 산에서 승천하신 주님이 그 감람 산으로 지상 재림하신다. 주님이 적대자도 멸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세워질 때(슥14:1) 적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군대를 므깃도 골짜기에 모으고 아마겟돈 전쟁을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새들의 잔치에 그 살덩어리가 먹잇감이 되고 멸망 받을 두 짐승은 유황불 붙는 못으로 던져진다.

이 최후의 전쟁은 말 탄 자의 입, 주님이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는다. 새들은 그 사망에 이른 살로 배불림을 얻는다. 아,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혼인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새들이 배불림을 얻는 새들의 잔치의 심판의 먹이가 된 무서움, 우리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즐거움의 잔치와 무서움의 잔치를 보며 신앙의 삶에 대해 주저만하고 있는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심판하고 죽는 새들의 잔치를 보면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으로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해 나가는 결심을 하자. 예수가 재림하면 심판과 상급의 기준의 말씀이다. 여기 들고 다니는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을 구별하는 척도요, 의의 심판의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게1:3에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실천하자. 세상 그 어느 달콤한 말보다도 예리한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육체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가 되자. 주님을 믿고 미래의 천국을 믿고 심판을 믿고 종말의 환난을 믿자. 

파스칼은 “믿지 않고 살다가 천국이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라고 말하며 그래서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말에 관해서도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이 있다면 믿지 않는 자는 준비되지 못했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믿지 않는 자는 잘못 사는 것이다. 믿고 살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믿고 살아야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이다. 혼인 잔치, 그것만이 내가 들어갈 잔치다. 새의 잔치, 거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분명하게 세상 끝을 보고 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돌아올 마지막은 아무 것도 없다. 죽음뿐이다. 그러나 지금 고통을 당하는 핍박이 있어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 주님을 기다리는 자, 주님의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자는 왕이신 주님의 신부가 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김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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