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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은 은혜 (사 5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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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은 은혜 (사 53:4-10)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밤에 도심을 밝히는 붉은 십자가랍니다. 촘촘히 세워진 십자가를 보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이냐고 묻는 외국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도심에 십자가가 많은 것을 보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인가를 묻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상징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주님이 고난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의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크게 4 종류입니다. 
  
1) 육체적인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는데 히10:20에 보면 이 휘장이 곧 예수님의 육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휘장이 찢어지듯이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육체를 입으신 자체가 고난입니다. 제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신발에 문제가 있어서 발톱에 멍이 들고 발톱 하나는 빠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발을 가지고 많이 걸으려고 하니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광야횡단을 할 때는 경주현 형제가 하도 나귀를 타야 한다고 하고 또 발도 아파서 나귀를 탔는데 이놈의 나귀가 제 몸무게를 감당을 못하고 비틀거리는데 계속 타고 있다가는 곧 쓰러질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내려서 걸었습니다. 저는 발가락 하나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그렇게 불편했는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시공의 제한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 고난입니다.
   
주님은 33년 동안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들이 육체로 당하는 고난을 동일하게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잡혀서 매를 맞으셨고, 채찍에 맞아서 몸이 찢어지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으며, 양손과 양발이 대 못에 박히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는데 그 때에 육체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숨을 들어 마실 때마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 환경적인 고난입니다. 
   
천국에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지지리도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막 11장에 보니 예수님은 먹지 못하셔서 주림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의 고난, 환경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제가 태국의 산지족 마을에 가서 느낀 것인데요. 한국은 너무나 좋은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살다가 태국 산지족 마을에 선교를 가보니 얼마나 불편한 점이 많은지 모릅니다. 호텔이라고 해서 좋은 곳인지 알았더니 지상에서 약 2m 정도 높은 1층 건물인데 대나무로 지어놓았습니다. 대나무 사이로 밑이 보이는데 밑에는 닭들이 뛰어다니고 돼지들이 꿀꿀거리며 지나가는데 지나가다가 똥도 싸고 오줌도 싸고 지나갑니다. 이불이라고 주는데 더러워서 덮을 수가 없습니다. 이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벼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자기가 무서웠습니다.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입니다. 일단 문이 불안해서 일을 못 보겠습니다. 누가 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뒤쪽 벽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다행히 변기를 놓기는 놓았는데 이게 어디로 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음에 팀을 데리고 오면 동네를 전도하려고 호텔 사장님하고 친해져야 하니까 돼지 1마리를 잡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돼지를 먹더라고요. 

저는 설마 그 사람들이 내가 주문한 돼지를 먹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다 먹고 저에게 주문한 돼지고기가 나왔는데 접시 하나에 거의 타다 말은 고기 몇 점이 다였습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요. 제가 몇 번 산지족 마을을 갔는데 그래도 우리가 단체로 갔던 곳의 호텔은 저와 아내가 갔던 호텔에 비하면 별 다섯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분은 산지족 마을을 경험한 후로는 절대 선교를 가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환경이 열악했던 것이지요. 잘사는 우리나라에 살다가 산지족 마을에 가보니 그렇게 힘이 드는데 주님은 천국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얼마나 환경적으로 고난이 되었겠습니까? 그것도 지지리도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지지리도 가난한 동네에서 사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환경적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3) 정신적인 고난입니다. 
   
주님은 제자에 의해서 은 30냥에 팔리셨습니다. 제자에게 배신당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수제자인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33세의 청년의 몸으로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흉악한 살인범이나 달려서 죽는 십자가에 죄 없으신 그분이 달리셨습니다. 정말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난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마 26:38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은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이 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고난 즉 정신적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4) 영적인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되셨습니다. 주님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가 주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도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 처하신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드셨던지 하늘을 향해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은 십자가에서 영적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고난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미 7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당하실 고난을 바라보면서 그 고난이 주님 자신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우리 대신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4절에 보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2번이나 우리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죠. 5절에 보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5절에서도 4번이나 우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역시 우리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니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말하는데 역시 우리 때문에 희생하셨다는 말입니다. 제물은 자신을 위하여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은 제주를 위하여 제물이 되고 제사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속건제는 레위기에 나오는 5대 제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손실이나 상해를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성격상 변상을 해야 하므로 배상제라고도 합니다. 주님이 배상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의 삯을 갚아야 하는데 우리가 갚을 능력이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 대신에 죽으시므로 하나님께 배상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맨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 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 1:29에 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당하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주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난당하시면서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는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 육체의 질병, 정신적인 병, 대인관계의 문제, 물질적인 문제 등등 온갖 종류의 문제가 죄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는 말은 죄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동안 교회 뒤에 있는 텃밭을 일구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텃밭 중에 절반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작년부터 와서 이제 자신이 나무를 심을 것이니 농사를 그만 지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밭이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에 아무런 주장도 할 수 없이 그 밭에서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밭은 법적으로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셔서 이제 우리가 잃었던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마귀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할 때 마귀는 모든 것을 놓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어떤 부분을 잡고 있다면 우리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야 예수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서 나를 대신해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너는 권한이 없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부분에서 손을 뗄지어다.” 그렇게 되면 마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손을 떼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신 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찾아오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나무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사 59:1,2) 그런데 주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생입니다. 
   
롬 6:23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말이고, 영생은 얻었다는 것은 지옥가야 할 우리들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3) 성령을 받는 복입니다. 
   
렘 5:25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러한 일들은 렘 5:24을 보니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성령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죄가 좋은 것을 막았다고 했는데 마 7:11과 눅 11:13을 보면 좋은 것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구속사의 순서를 보면 십자가 후에 성령강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게 되면 우리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보면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마귀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데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백이면 백 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고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이집트에서 시내산을 오를 때 있었던 일입니다. 걸어서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고, 8부 능선까지 낙타를 타고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몸에 좀 이상이 있어서 낙타를 타게 되었습니다. 황신혜 청년도 낙타를 탔기 때문에 산을 오르면서 저하고 대화를 나누며 올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황신혜가 탄 낙타가 집으로 가고 싶었는지 뒤로 돌더니 산 아래로 마구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시내산이 순 돌산입니다. 아래에는 나무가 몇 그루 있지만 산 위쪽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돌산입니다. 

신혜가 낙타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판단할 때는 거의 사망 아니면 중상입니다. 이때 제가 타고 있던 낙타를 몰고 비호같이 달려서 신혜가 타고 있는 낙타의 고삐를 잡고 세우면 좋겠지만 저도 낙타를 몰지 모르고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주님을 찾으면 안전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낙타 몰이꾼이 순간적으로 달려가더니 낙타의 고삐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낙타 몰이꾼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성령님은 낙타 몰이꾼이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도왔던 것처럼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은혜 받게 하고, 열매 맺게 하고,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게 하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4) 부요함입니다. 
   
고후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이 주이십니다. 하늘은 그분의 보좌이며 땅은 그분의 발등상입니다. 금도 주님의 것이며 은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이 마 8:20에 보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을 부요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자들 가운데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타가운 일입니다. 복음에 반하는 삶입니다. 물론 특수한 경우 고난과 가난 속에서 주의 듯을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재정적인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재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부요함의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훈련이 끝나면 정금처럼 쓰실 것입니다. 훈련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목적대로 나를 훈련하도록 맡기십시오.
   
둘째,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잠 13:4).
   
셋째,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갈 6:7).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열심히 재물을 심어야 거두는 것입니다.
   
넷째, 맡겨 주신 것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많은 것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조금 맡겨보시고 그것에 충성할 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다섯째,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딤후 2:20).   
성경은 사람을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조건 많이 받는 것이 복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어야 받은 것이 복이 됩니다. 위장이 작은 사람이 많은 음식을 먹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처럼 감당 못할 사람에게 많은 재물이 생기면 오히려 해가 됩니다.
   
여섯째, 부요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부요의 복을 예비하셨지만 우리가 믿지 못하면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았던 경험 때문에 부요를 믿지 못합니다. 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요를 믿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부요의 복을 믿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갈 3:9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그의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병사만 318명이었으니 얼마나 부요한 사람이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으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5) 건강의 복입니다. 
   
5절에 보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건강의 복을 어떻게 누리느냐는 것입니다.
   
병에서 놓여 건강을 누리는 몇 가지 원리가 성경에 나옵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공로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미국에 유명한 신유의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을 받고 그 교회에 일찍 도착했더니 현관에 어떤 앉은뱅이 부인이 있었습니다. 부흥 목사님은 부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부인, 여기 앉아서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저는 앉은뱅이예요. 오늘 이 교회에 신유의 능력을 가지신 목사님이 오신다기에 그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목사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병 고침을 받으려고 이렇게 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꼭 병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주위에는 동행자도, 휠체어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물었습니다. “그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나요?”, “차를 타고 왔지요. 그리고 제 아들이 그 차 속에 휠체어도 넣어 왔어요. 그러나 오는 도중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도착한 즉시 그것들을 모두 보내버렸습니다.”, “아니, 왜 보내셨습니까? 가실 때 어떻게 하시려구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 목사님만 만나면 걸어서 혼자 집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기뻤습니다. “자매님, 내가 바로 그 목사입니다. 꼭 나을 줄 믿습니다.” 목사님은 손을 잡아끌며 말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 즉시 그 여인이 일어나 걸어 다니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여인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나을 것을 믿고 자동차도 휠체어도 돌려보냈으니 대단한 믿음이죠.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 여인의 믿음보다 더 발전적인 믿음을 원하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도 필요하겠지만 더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으니 나는 당연히 건강하다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도를 주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에 근거해서 질병에 대한 치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 가신 목사님 중에 골반에 문제가 있어서 못 가실 뻔 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저희들은 그 목사님의 회복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전에 어떤 단체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상처를 받으셨는데 저희들과 함께 기도하고 다니다보니 마음이 회복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만 회복 된 것이 아닙니다. 육체도 회복되었습니다. 걸어서 시내산도 올라가셨고 모든 활동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회복은 계속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말 4:2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라고 약속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 눈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이거든요. 두려운 존재가 있으면 그 존재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몇 번 갔는데 미국에 가면 운전자들이 경찰을 두려워합니다. 미국 경찰은 무섭습니다. 우리나라는 어찌 보면 경찰이 호구입니다. 경찰이 시민에게 매 맞는 나라가 우리나라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경찰은 시민이 때리려고 하면 총쏴버립니다. 무섭습니다. 운전하는데 경찰이 서라고 하면 서야 합니다. 안서면 역시 총쏴버립니다. 섰는데 손을 밑으로 내리고 물건을 만지작거리면 역시 총쏴버립니다. 그래서 경찰에게 잡히면 손을 핸들 위에 올리고 있어야 합니다. 딱지 끊기면 골치 아픕니다. 우리나라는 서울 사는데 부산에 가서 딱지 끊겼다면 내가 사는 서울에서 범칙금 내면 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내가 동부에 사는데 서부에서 딱지를 끊었다면 서부까지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동부에서 서부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미국이 우리나라처럼 코딱지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휴스턴에서 LA 가는 것을 우습게 생각했는데 비행기 값이 편도만 650달러입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들이 경찰 눈치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눈치 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일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믿는 자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막 16:17-18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능력과 권세는 다른 것입니다. 능력은 있지만 권세가 없는 사람이 있고 권세는 있는데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센가요? 당연히 권세자입니다. 일당백 일당천의 능력을 소유한 특수부대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혼자서도 수백 명의 적을 당해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권세가 없습니다. 반면에 그 부대를 통제하는 지휘관을 생각해봅시다. 부대장은 부대원들처럼 잘 싸울 능력은 없습니다. 나이도 많고 체력도 부족하고 특수 훈련도 부대원들처럼 받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부대원들보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대원들을 다룰 권세가 있습니다. 일당천의 능력을 가진 부대원이라 할지라도 권세를 가진 부대장의 말 한 마디면 그대로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요 1:12을 보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들입니다. 왕의 아들은 왕자입니다. 왕자는 벼슬이 없어도 정일품의 우의정, 좌의정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명령합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마귀를 대적합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질병을 꾸짖습니다. 권세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면 믿음으로 명령하는 대로 마귀도 떠나가고 질병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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