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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사랑은 기적을 만든다 (눅 18: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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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은 기적을 만든다 (눅 18:31-43)

내용 : 믿음 + 사랑 = 기적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장면입니다. 
주님은 기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② 시몬의 집에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향유를 깨뜨려 경배하던 여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경배하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었던 자세를 주님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셔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시몬을 책망하시며 이 여인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③ “주여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말씀만 하소서, 제 종이 낫겠나이다. 라고 고백하던 가버나움 백부장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습니다. 

▶ 이런 모습들을 종합해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은 주님 앞에서 죄인 됨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며 아버지 나는 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대조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제자들과 소경 거지의 모습입니다. 

1. 제자들의 모습 = 안타까운 모습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의 관심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이런 관심은 누가복음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13:22)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눅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점점 자주 점점 더 가까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여리고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말씀하신 것입니다. 

① 9:22 “예루살렘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

②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 우리라” 
두 번의 내용은 간략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수난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31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나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우연이나 실패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2-33절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이방인에게 넘겨짐, 희롱, 능욕, 침뱉음, 채찍질, 죽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대접입니다. 이방인들의 마음대로 예수님이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하십니다.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말씀하십니다. 살아나리라.

고난이,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말씀하실 때 언제나 고난과 부활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인간의 악함에서 비롯된 고난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부활도 아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므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일과 받으실 고난을 말씀하셔도 제자들은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반 이상을 함께 다니며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 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만 올라가시면 왕이 되시고 자기들은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을 것을 생각하고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막10:40-41)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물밑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순수함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어머니까지 앞세워서 로비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이기 때문에 고난당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대부분의 메시야 상이었습니다. 메시야는 권능의 왕입니다. 이 땅에 참된 해방과 자유를 주는 그런 왕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야의 고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로 불가능한 생각이었습니다. 

◈ 자기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될 것을 요구하며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자기 생각, 자기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모르는 영적 장님들이 되고 말았습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 내가 믿지 않으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믿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 외에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열린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열린 마음만큼 보이고 그 신앙의 깊이 만큼 들려지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대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떤 부분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막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이 출세의 길이고, 영광의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희생한 사람들이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말, 이 세상에서 배나 받는다는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모습. 

◈ 소경 거지 바디매오 - 아름다운 모습

이어서 누가는 소경 거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자들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의 이름은 바디매오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리고를 떠나실 때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 있었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걸하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치유하신 사건은 기적보다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한 소경이 있었습니다. 
소경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부모, 가족, 친구의 얼굴도 모릅니다. 맛있는 음식도, 아름다운 자연도 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여리고의 봄도 보지 못합니다.
바디매오가 살고있는 곳은 여리고입니다. 

이 곳은 광야에서 오아시스와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여리고는 아름답다
바디매오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살았지만 그의 인생은 어둡고 답답하였습니다. 
거기다가 바디매오는 가난했습니다.

이 사람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거리에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에게 구걸을 하는 거지였습니다. 구걸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형편...
사람들이 많이 지나 다니는 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하는 말을 들으며 귀로 세상을 보며 하루 하루 살았습니다. 
바디매오는 아무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 바디매오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수많은 귀먹거리와 벙어리를 낫게 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다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라는 소식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길을 걸어서 지나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디매오는 열심히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기회가 온 것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심각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생겼습니다. 바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에 시끄러우니까 잠잠히 하라는 꾸짖음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자기의 죄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하여 벌로 소경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무시를 당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죄인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이 소경 거지는 주님의 긍휼을 바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잠잠히 하라, 조용히 하라 며 그를 말렸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구걸을 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르는 줄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위기입니다. 그래 나 같은 놈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냐? 생각하고 물러설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런 장애물, 이런 장벽을 극복하며 더욱, 심히 소리질렀다. 
장님 바디매오가 외치며 사용한 말이 38절과 39절에 나오는데 그 말이 전혀 다릅니다. 
38절에는 사람들의 주위를 끌기 위하여 보통 큰 소리로 외친 말입니다. 
그러나 39절에는 사람들이 잠잠 하라고 꾸짖고 저지하니까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두 번째는 비명을 지릅니다. 거의 동물적인 울부짖음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바디메오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소경 바디메오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 때마다 눈을 만져 주시면서 너의 원대로 되라고 하시면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단 한번 특이하게 눈을 뜨게 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어느 소경의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셔서 눈을 뜨게 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바디매오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있는 신앙의 고백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바디매오의 믿음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37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는가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보내실 분, 즉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가 오실 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메시야라는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활동한 이사야의 예언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귀가 번쩍 열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메시야라고는 믿었지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자기 생각으로 막혀서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선생님, 나사렛 예수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와주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에서 온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언된 메시야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어도 어느 누구하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마 바디메오의 소원은 다 들어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길 원하느냐?" 

그러자 바디메오가 대답했습니다. -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에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의미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눈뜨고 난 후 가족들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주님을 본 순간, 바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이전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한사코 말려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도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눈을 뜬 바디매오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를 자기의 눈으로 확인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동안 서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앞을 못보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 취급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거지 노릇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 서러웠을 것입니다. 

이런 바디매오가 절망하지 않은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을 보고 싶어하는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을 보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시므온은 그의 생전에 예수님을 보고 죽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례를 받기위해 성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늙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재인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제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바디매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른 믿음의 열매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뜬 바디메오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 바디메오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앞으로 펼쳐 가실 일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덕분에 누리고 싶은 출세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육적인 눈은 감겨 있지만 믿음의 눈은 제자들보다도 더 밝히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중요한 시점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 바로 바디매오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왕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처럼 입성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는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보는 능력, 듣는 능력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것이 육신의 시력만으로는 제한적입니다.
200m앞을 볼 수 없습니다. 듣는 것도 제한적입니다. 너무 큰소리도 못 듣고 너무 적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시력 때문에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컴퓨터를 모르는 컴맹도 답답한 일입니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도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답답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은 영안이 열리지 못한 "영맹"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입니다. 
돌아가야 할 그 본향,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입니다. 

영적인 눈이 막혀있는 영맹은 가장 안타깝고 절망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눈을 열어주는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으로 영적인 눈을 열어 달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한 영혼의 믿음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고쳐주시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더 커지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떤 경우가 되어도 낙심하지 말고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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