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닫힌 인생에서 열린 인생으로 (막 7:31-37)

첨부 1


닫힌 인생에서 열린 인생으로 (막 7:31-37)


지난 목요일에 서재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카톡이 왔습니다.  보니까 삼남교회 안중욱 목사님이 카카오스토리 친구를 맺자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을 겸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카카오스토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유인 즉, 내 생활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목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오 목사!  그것은 중년기에 경험하는 갱년기와 우울증의 시초다."

좀 황당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야, 무슨 그런 말을 하냐?  나는 아직도 갱년기가 오지도 않았고, 우울증과는 거리가 명왕성만큼이나 멀다."
그랬더니 안 목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나이가 되어서 감출 것이 무엇이고, 드러낸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무엇이냐?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살아라!"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러 면에서 점점 열린 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것이 열려져야 하는 그런 사회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를 비롯해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많은 CCTV들, 각종 블랙박스들이 우리의 하루 일과를 그대로 다 열어놓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오늘의 사회를 가리켜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열린 사회의 한 구석에서는 아직도 자기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닫힌 마음으로 이웃과 소통하지 못한 채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주위에 보면, 이 관계가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경험했던 마음의 상처가 말뚝이 되어 가슴에 박혀서 혼자 아파하다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팽이처럼 자신 속에 갇혀서 이웃으로부터 철저하게 자기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외부와의 관계를 닫아버리고 달팽이처럼 똘똘 꽈리를 틀 듯이 뭉쳐서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기의 모습.  그러나 어느 날 객관적으로 한 번 보십시오.  이것이 나인가?  굳고 굳은 고집에 껍질을 뒤집어쓰고, 무서운 방어의 벽 속에서 자기를 감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갇혀 있으면 그때부터 썩기 시작합니다.  자기 안에 꽈리를 틀 듯이 갇혀 있으면 그 심령이 부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착각과 아집과 독선과 불평 불만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딱딱하고 굳은 껍질 속에 갇혀 있는 달팽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가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 밖으로 한 번 나와 보십시오.  그러면 이전에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생명의 신선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눈을 열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는 다시 일어섬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내 눈은 창조의 아름다움의 꿈틀거리고 있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무지하고 게으를 뿐만 아니라 그 기질이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런 인간의 내면에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을 성장시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선포되는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모든 억눌림과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리나 결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달팽이처럼 꽉 닫혀진 공간 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 가는 사람들….  우리는 결코 경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유형의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 중에서도 중증의 겹쳐진 불행을 앓고 있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해서 거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거기에다가 마음까지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고통 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 따라서 대화가 전혀 불가능했던 사람,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닫힌 마음을 열어서 열린 인생으로 변화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말못할 상처를 가슴에 안고 이웃과의 관계를 닫아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방적이고 열린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유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은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향해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치유하심을 통해 닫힌 마음들이 열린 마음으로 변화되는 변화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육체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감옥입니다.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일 겁니다.  그리고 정신적 장애보다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장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선포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가슴이 삭막한 사막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위엄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답답한 자기의 세계 속에서 폐쇄된 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이 또한 괴롭혀지고 어두워진, 그리고 모든 질서가 뒤바뀐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한 번 세상을 고치고자 하십니다.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주님께서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리고 그는 열렸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꽉 닫혀졌던 가슴이 열렸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귀가 열려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할 인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열리지 못하고 닫혀진 세계 안에서 외로움 가운데 괴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넓게 보지 말고 바로 나 자신을 보십시오.

닫혀진 내 인생의 벽, 달팽이처럼 꽈리를 틀고 내 인생의 관 속에 갇혀 있는 나!  사랑하는 여러분,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과 단절한 채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거부하고 혼자만으로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도 어떻게든 탈출해서 새로운 삶, 부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꽈리처럼 틀고 앉아 있는 이 내 속에서 빠져 나와 당당함 가운데 아름답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닫힌 마음, 닫힌 인생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십니까?

첫째로, 그는 닫힌 인생을 보고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던 이 사람, 말도 어눌했던 이 사람, 그래서 마음을 닫고 살았던 이 사람을 보셨던 예수님은 하늘을 쳐다보시더니 탄식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탄식'이라는 단어는 "저 사람 참 안되었구나"라고 하는 그냥 단순한 동정에서 끝나는 그런 평범한 탄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탄식'이라는 단어는 많은 영어 성경에 보면 "a deep sigh"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깊은 탄식"이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의 고통을 마치 내 고통처럼 온 몸으로 안고 아파하는 그런 깊은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고통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이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가 만나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실 때마다 복음서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영어에는 "moved with compassion"이라고 해서 "연민으로 그의 마음이 들끓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compassion"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com"과 "고통을 느낀다"는 "passion"이라는 두 글자의 합성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외로움을 자신의 외로움처럼, 이웃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이웃들의 답답함을 자신의 답답함처럼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귀가 먹어서 이웃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세월을 살아왔던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그가 신체적 청각장애자였을 뿐 아니라 영적인 청각도 고장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눌해진 혀는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마음은 이웃들만 아니라 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해서도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시면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런 사람의 증세를 가리켜서 '영적인 자폐증'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여러분, 자폐증의 증상을 아십니까?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 제대로 눈을 맞추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감정 표현이 아주 둔화되어 있습니다.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한 두 가지의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달팽이처럼 자기의 세계에만 갇혀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소위 자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이런 자폐증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자폐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신앙에 관해서 귀가 먹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한 눈이 감기워진 채 마음이 닫혀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외로움과 답답함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이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며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람의 외로움과 답답함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과 고통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을 주목해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아파하시며 탄식하고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96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높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2절은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예수를 가리켜서 한 마디로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닫힌 마음, 닫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참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내 인생을 바라보시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길이 힘드십니까?  인생길이 지치고 힘들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당신의 처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아파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 아파하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닫힌 인생을 친히 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잘 듣지를 못하는 그를 생각해서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은밀한 공간에 도착하자 그를 한없는 연민으로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그의 양쪽 귀에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듣지 못하고 그 많은 세월들을 살아왔던 이 사람의 양쪽 귀에다가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침을 바르시더니 어눌한 채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그의 혀를 만지십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이 사람이 느꼈던 것을 여러분이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하고 친밀한 손길이었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포스터 모던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포스터 모던 시대의 특징은 해체와 파괴입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서 조각 나 버리는 시대입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만의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스킨십에 목말라하는 고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내 곁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 곁에 스스로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지기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과 지친 몸을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만져주시는 그 순간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육체적으로 질병에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지시는 순간 치료가 일어납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만지시는 순간 그 마음이 치유가 되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는 순간 닫혀진 마음들이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경험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상처난 마음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지친 몸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닫혀진 마음들이 열려지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거룩한 꿈과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영광의 주를 마음껏 찬양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닫힌 인생을 향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닫힌 인생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하실까요?
본문 34절에 보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딱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에바다!"

"에바다"라는 말은 우리말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듣지 못하는 이 사람의 양 귀에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깊은 탄식으로 아파하시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소리, 예수님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본문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 시작합니다.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까?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 한 마디 "에바다, 열려라!" 이 말 앞에 그는 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심령 속에서는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예, 열고 싶어요!"  그리고 모든 것은 변화된 것입니다.  "에바다, 열려라"는 그 말씀 앞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화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에바다, 열어."
"이제는 열어.  언제까지 닫고 살거야.  마음을 열어!"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는 나와 더불어 함께 먹으며, 인생의 축제를 시작하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제 인생, 그와 함께 살아가는 영원한 하늘 잔치의 복된 인생을 사모하십시오.  인생은 살아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야 하고, 또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설교 사역도 하는 토니 캄폴로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한 번은 하와이로 휴가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한 밤중이었는데, 시간 차이로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파서 밤 2시가 넘어서 거리로 나와 해변가를 한참 걸었다고 합니다.  혹시 영업하는 식당이 있나?  드디어 한 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는데 아주 엉성한 식당이었다고 합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생각처럼 지저분하고 정말 분위기도 없는 그렇고 그런 식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식당에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막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식당 문이 열리더니 7, 8명의 여자들이 들어왔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여인들이 아닌 거리의 여인들이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떠들썩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한 여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내일이 내 생일이다.  벌써 39살이 넘어갔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여인들이 일제히 여기 저기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야, 어쩌란 말이냐?  생일 잔치라도 해 주란 말이냐?  케이크이라도 사라는 말이냐, 아니면 노래라도 불러야 한다는 말이냐?  너 같은 신세에 무슨 생일 타령이냐?"

이렇게 구박을 해대기 시작하자 이 여인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외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 보고 생일 잔치를 해 달라고 그랬냐?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소리를 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느냐?"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욕설이 오가더니 싸움판이 벌어지고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식당 한 구석에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캄폴로 교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고 합니다.  "내일이 내 생일인데"라는 말에 그냥 누군가가 "축하한다"는 한마디 말이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이것이 싸움판이 되고 난장판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상처들이 이들로 하여금 단순한 생일 축하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식당 주인이 싸우고 있는 여인들을 말렸습니다.  여인들의 소란은 진정되었고 이 여인들은 하나씩 하나씩 뿔뿔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식당의 주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 분들이 자주 식당에 오나요?"  이 때 식당 주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자주가 아니라 매일 오지요.  똑같은 시각에 옵니다.  단골인데 좀 골치 아픈 손님들이지요."

그러자 캄폴로 교수가 말합니다.  "사실은 제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저에게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뭔데요?"  "그 여성 가운데 내일이 생일이라는 여성이 있잖아요?  그 여인의 생일 잔치를 제가 준비하고 싶습니다.  주인께서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때 그 주인 옆에 있던 주인 부인이 "아니 선생님!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하셨나요?  그 여인의 이름은 아그네스인데요, 착한 여자예요.  그런데 불쌍한 여자지요."

이렇게 해서 주인 내외와 토니 캄폴로 교수는 그 이튿날 새벽에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한 밤중에 식당을 꾸며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 부인이 알고 있는 거리의 여인 몇 사람에게 미리 귀뜸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 중 2시가 넘어서 그 거리 인근의 모든 거리의 여인들이 그 식당에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새벽 3시 반, 드디어 아그네스가 몇몇 친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칩니다.  "Happy Birthday, 아그네스!"

이 아그네스라는 여인은 식당으로 들어오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라는 표정.  캄폴로 교수는 자기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놀라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그네스.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이 여인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려오더니 어깨를 흔들면서 통곡하며 울어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식당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흥건하게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아그네스에게 "아그네스, 생일 케이크를 잘라야지."

마련된 케이크가 등장하자 그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던 아그네스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요, 부탁이 하나가 있는데요.  이 케이크를 지금 자르기 보다 제가 집에 가지고 가서 얼마 동안 이렇게 간직하면 안될까요?"  누군가가 동의를 했습니다.  그는 케이크를 집에 갖다 놓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그 케이크를 들고 식당 바깥으로 나갑니다.  마치 무슨 보물을, 마치 무슨 거룩한 물건을 가지고 나가듯이 식당 바깥으로 케이크를 들고 나가는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순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다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저 아그네스의 행복과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면 안될까요?"  "예, 기도해 주세요."  캄폴로 교수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울고 있었습니다.

캄폴로는 기도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행복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으시겠습니까?"  "예, 오 예!"  그날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였습니다.  캄폴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그날 상하고 닫힌 마음들이 활짝 열리는 광경을 보았으며, 이 엉성한 식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캄폴로 교수는 책 한 권을 쓰게 됩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파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축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 문을 여는 순간 이 축제는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들리지 않으십니까?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여러분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있는 그 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닫힌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내가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초대하는 그 순간, 축제는 시작이 됩니다.  오늘 주님의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 축제를 선물로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의식하며 메마른 사막과 같은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행복한 푸른 초장과 같은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 시간 무너진 관계의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회복은 깨어짐의 아픔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복은 인생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능해집니다.

♬"내 가는 길 고달파도 주님 나의 힘이 되사
나를 인도해 주시네 나를 도우시네
내 가는 길 멀다 해도 주님 나의 목자 되사
나를 인도해 주시네 나를 도우시네
괴로운 마음들 오세요 우리 주님을 만나요
외로운 마음들 오세요 우리 주님을 만나요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죠"♬

오늘 이 시간 예배하고 찬양하는 가운데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아파하는 그 아픔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나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에바다!  열려라!"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