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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국 성도를 위한 기도 (요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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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 성도를 위한 기도 (요 17:20-26)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0-26) 


제자들의 전도로 믿게 된 사람들 

17장,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문 마지막 부분입니다.  만국 성도를 위한 기도문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  

그냥 “성도들”을 위해 빈다고 하시지 않고, “그들의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전도로 믿게 될 사람들을 예상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힘들게 전도하여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스스로 알아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를 통해서만 믿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러므로 먼저 제자 된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주라는 사실을 열심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오늘 우리 자신도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성도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주님은 장차 나타날 온 세상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

첫 번째 기도는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앞서서 11제자들을 위해서도 하셨습니다.(11절)  세상에서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12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이기심과 경쟁심이 가득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려고 올라가는 길목에서도,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가요?  청교도 설교자였던 Thomas Brook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불일치와 분열이 있을 수 없다. 늑대가 양을 무섭게 한다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한 양이 다른 양을 두렵게 한다면 이는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일이다.”  양이 양을 무서워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기괴한 모습입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밤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밤길에 늑대나 호랑이가 무서워야지 왜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까?  서로 해치는 인간 세상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인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목사가 교인을 가장 좋아해야지 왜 무서워합니까?  교인이 마귀의 역사를 무서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해야지 왜 교인을 무서워합니까?  그것은 그만큼 오늘의 교회가 대립과 분열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 되게 해달라고 끝없이 기도하십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일치는 어떤 것일까요?  정치적 일치일까요, 조직적 일치일까요?  아니면 교리적 일치일까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이름으로 다 하나 되는 것일까요?  주님이 바라시는 일치는 보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11,21,22)  영적이고 내면적인 일치가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교단이 다르고 교리가 다소 다르더라도 일치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구주를 믿고, 같은 천국을 믿고, 같은 아버지께 속하고, 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고, 같은 모범을 따라 살고, 같은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고, 같은 영광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통해서 하나 되기를 힘쓴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넉넉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영적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주신 목적은 하나 되게 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아버지께 받아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아픔이요 고통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지워주신 영광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결코 형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광으로 생각해야한다.  학생들에게, 혹은 기술자에게, 혹은 외과 의사에게 보다 더 힘든 과제를 맡긴다면 우리는 그를 더욱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그들만이 그 과제를 맡을 수 있다는 신뢰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영광으로 여겨야 된다.”  하나님께 가장 인정받는 자만이 맡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요,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를 나누어 진 영광의 참여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영광의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순종과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지워주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사랑하고 아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피차 지는 것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주님의 것과는 견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요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봉사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 희생, 봉사, 利他主義, 하나님 영광.  이 모든 것이 우리로 내면적인 일치에 이르게 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적인 자랑들을 억제합니다.  이름 자랑, 출신 자랑, 외형 자랑, 능력 자랑.  모든 자랑을 버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피차 사랑하고 순종하게 만듭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즉,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화목 제물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14:6)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은 영적 무능자들입니다.(15:5)  예수를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 인내, 거룩, 자비, 공의, 선, 생명, 능력, 영원함.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분열하고 대립하는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앉는 사람도 문제지만, 예수님 자리에 사람을 올려 앉히는 사람들도 문젭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영웅” 만들고 “스타”만드는데 분주합니다.  사람 앞에서 환호하고 소리치며 몰려다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자리에 사람을 앉히는 주범들이요 공범들입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일치가 되겠습니까?  인간 영웅이 있는 교회는 일치가 어렵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심에 계신 곳, 그곳에 일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 됨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지상적인 의미에서만 본다면 하나 됨의 가장 큰 목적은 전도에 있습니다.  21절과 23절 말씀은 다 같이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들을 믿게 하고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  성도들은 불신 세상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모니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 자신들보다는 성도들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거룩을 보고, 인내를 보고, 자비와 능력과 생명을 봅니다.  우리 속의 하나님 인격을 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충실히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충실히 보여준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오늘 내가 하나님을 보여줬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납니까?  일치가 없고 십자가 영광이 없으면, 전도는커녕 보는 사람마다 주님을 떠납니다.  대립과 분쟁, 이기적 경쟁심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등을 돌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특히 믿음 좋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됩니다.  주님 당시에 가장 철저한 신자였던 바리새인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  영광의 일치를 통해서 전도의 문을 여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두 번째 기도는 성도들에게 천국을 보장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성도들의 종점은 천국입니다.  저는 장의사 다음으로 죽음을 자주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을 자주합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천국은 있는가?  천국이 있다면 나는 과연 천국에 이를 수 있을까?  나는 무슨 근거로 천국에 가리라고 확신하는가?  

Warren Wiersbe는 세 가지 근거로 자신이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내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요.(3:14-16)  
둘째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고 그리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요.(14:1-6)  
셋째는, 주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17:2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이 있으세요?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립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대접 못 받고 사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세요?  무국적자(無國籍者)들입니다.  지금도 영토 없이 떠도는  전 세계 난민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푸대접을 받습니다.  수용소 외에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일터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어디로 옮겨갈 수도 없습니다.  지성인이든 귀족이든 무시당합니다.  이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죽어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보장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인생들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월세 방 하나 없더라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죽어서 들어갈 천국이 없으면 정말 곤란합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맨션이 많아도 돌아갈 천국이 없는 사람은 벌레만큼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세요.  부자는 세상에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습니다.  영원한 고통이 시작됐어요.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천국 얘기를 하면 자연히 지옥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가상의 장소로 생각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가상적인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不死的입니다.  죽지 않아요.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그 영원한 상태가 어떠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명백히 증거 합니다.  주님은 “지옥”(마5:22,29,30.10:28.18:9.23:15.눅12:9)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셨습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마25:41)의 처소입니다.  
“영벌”(마25:46)의 처소입니다.  
“바깥 어두운 데”(마8:12)요, 
“유황 불붙는 못”(계19:20,20:14,15)이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계20:10)입니다.  
“둘째 사망”(계20:14,21:8)의 장소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막9:48-49)하신 곳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형벌 받는 곳”(마10:28)입니다.  

사람마다 본성적으로 지옥을 두려워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웃으면서 싫다 하던 사람도, 그러면 지옥에나 가라고 하면 화를 버럭 냅니다. 사람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죽음 다음에 다가올 지옥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의 영혼들도 지옥이 무섭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지옥은 정말로 무서운 곳입니다.  
  
천국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24절에서 주님은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지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11절 말씀에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아버지의 품 곧 천국입니다.  그곳에 우리를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다락방 훈화의 초두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3)  

주님이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시겠다는 의지는 확고부동(確固不動) 합니다.  9,15,20절의 말씀에서 주님은 “비옵나이다”라고 했는데, 24절에서는 “원하옵나이다”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보다는 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왔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일에 대하여만은 “원하옵나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주님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목표가 하나님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천국에 이르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립니다.  성경은 인생을 뭐라고 합니까?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 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욥7:6-7)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5,9)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전6: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벧전4:14)  
  
우리는 이 짧고 유한한 지상의 삶에 매달릴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을 목표로 살아야 됩니다.  천국은 교리적으로 만들어 낸 장소가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본성적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려고 준비하신 곳입니다.  모든 신령한 성도들이 체험하고 바라보는 곳입니다.  한 때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한부”라는 말이 붙어서 문제가 된 것이지, 종말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보니까, 인공위성이 날아다니는 시대에 무슨 천국이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천국 없는 기독교인이 신자입니까?  예수님은 재림하십니다.  종말은 옵니다.  천국으로 갈 날이 와요.  

그래서 바울은 이런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3-4)  

천국을 목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국적은 세상 떠나면 필요 없어집니다.  그러나 천국 국적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은 버릴 각오를 했어도 천국 시민권만은 소중히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천국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이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이시며, 천국의 문이십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천국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과학으로도, 철학으로도, 어떤 이론으로도 천국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을 아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7,9)  

주님은 창세전에 영광의 천국에 계셨습니다.(24)  잠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지셨지만, 다시 영광의 천국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만국 성도들을 모두 불러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에 혼자 찾아 갈 만하시거든 찾아 보세요.  그러나 모르시거든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천국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에 이르도록 기도하십니다.  기꺼이 천국을 확보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보고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만국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만국 성도를 위하여는 두 가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진정한 일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모습이 반영됩니다.  하나 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천국을 보장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를 믿어 천국 시민권을 확보하고 사시다가, 부르시는 날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25-26절 말씀은 기도라기보다는 결론적인 보고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5-26)  

주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한 일을 아버지께 보고하십니다.  첫째로,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 아버지를 알게 했다는 것이요,  둘째로, 주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의 목표는 삼위 하나님과 성도가 사랑으로 교통하며 하나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도가 사랑으로 하나 된 천국, 그리고 하나 된 교회!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요 주님의 목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제 이루게 되었다는 뜻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보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주님 앞에서 자신의 행적을 보고해야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보고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의 일치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보고하실 수 있겠습니까?  대제사장으로서 주님은 위대한 보고를 마칩니다.  마지막 날에,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 하나님 앞에서 세상 삶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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