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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상태에 들어간 노아 (창 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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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상태에 들어간 노아 (창 6:5-10)


아담 이후로 노아 홍수가 나기까지 1656년 동안 늘어난 인구의 숫자를 구약학자들이 계산해보니 10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 기간을 ‘옛 세상’이라고 하는데 옛 세상에 살던 약 10억 명 중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홍수로 인해 모두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노아가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노아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해석되어 성경이 ‘행위구원설’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지만 결코 그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노아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하나님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동사는 ‘보았다’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창 6:12). 하나님은 보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볼 수 있는데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진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외면만 볼 수 있고 내면은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정확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보시기에 홍수가 나기 전 당시 사람들의 외면과 내면이 모두 악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을지 여러분은 상상이 가십니까? 이것을 ‘신인동형론적인 언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한탄을 하시고 무슨 근심이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그랬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7). 

여기서 ‘쓸어버린다’는 말씀이 육신과 영혼 모두를 멸절시키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단들은 사람이 죽을 때 영혼도 같이 멸절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20). 

노아가 방주 예비할 동안 순종치 않은 자들의 영혼은 옥에 가있다는 것입니다. 옥은 무엇을 뜻합니까? 지옥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홍수로 인해 육신은 죽고 영혼이 지옥에서 영영히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 7절에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라는 말은 사람의 육신과 영혼이 멸절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를 부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은 죽고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노아의 여덟 식구는 살아남았습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근로의 대가라면 그것은 임금 혹은 삯이라고 하지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즉, 노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악한 존재였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악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술을 잔뜩 먹고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든 것입니다. 함이 이것을 보고 아버지의 흉을 봤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노아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본성이 악했습니다. 노아도 홍수로 인해 죽어 마땅했던 것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그러므로 노아도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구원받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아가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노아가 받은 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노아가 받은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의’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노아가 어떻게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사도 바울이 강조한 진리도 바로 ‘이신득의’였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값없이’라는 말은 어떤 공로도 없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어떤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로도 없고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 모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아 의인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노아가 받은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7:1). 

누구 앞에 의로움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의로웠습니다. 사람이 볼 때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의로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줄줄이 외우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 수준의 의를 가지고는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의로운 존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인데 이보다 더 나은 의를 도대체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고 마리아에게서 나셨지만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죄가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구속사역의 중요한 두 국면인데 그 삶을 통해 믿는 자에게 완전한 의를 준비해주셨고, 그 죽음을 통해 믿는 자에게 죄사함을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되고, 예수님의 의로운 삶을 말미암아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이 의를 옷처럼 입혀주십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옮겨져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옷처럼 입혀지게 되고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 옷 입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착해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0). 

우리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의 겉옷을 입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의로 옷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요 의인인 것입니다. 

노아가 가진 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외상으로 받은 것과 같고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현찰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노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미래이고 우리에게는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의인이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셋째, 노아가 받은 의는 ‘법적인 의’입니다. 창세기 18장 25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리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5).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심판하시는 이인 하나님이 너는 의인이라고 판결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의는 실질적으로 완전한 의인이 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법적으로 인정해주시는 의인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복음이 잘못된 이유는 법적인 의의 개념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의로워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천국에 갈만큼 실질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법적으로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마 12:32).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엡 1:21). “금생과 내생에” (딤전 4:8). 금생과 내생을 사는 것입니다. 금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입니다. 짧게는 70년에서 길게는 100년을 사는데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가 짙거나 연하다고 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도 70년이나 100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살면서 맛있는 것을 조금 더 먹는다고 행복해집니까? 예전에 저는 명절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불고기가 나와도 일부러 먹지 않습니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혈압이 올라가고 당뇨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풀만 골라서 먹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는다고 해도 어차피 금생은 짧게 지나갑니다. 하지만 내생은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내생의 삶은 어떻게 결정됩니까? 

금생에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법적인 위치에 있느냐가 내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생을 영원히 행복한 천국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보낼 것인지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법적인 위치에 서 있는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옷을 입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그의 의를 전가 받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6).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금생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내생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Ⅱ.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세 사람에게만 사용됩니다. 

창세기 5장 24절의 에녹과 창세기 6장 9절의 노아 그리고 말라기 2장 5~6절의 레위에게만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평소에도 늘 동행하고 순종하며 친구가 되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어쩌다가 한번만 동행한 것이 아니라 늘 습관적으로 동행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삶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옥행 인생을 살았지만 노아는 천국행 인생을 산 것입니다. 노아의 삶은 하나님과 ‘거룩한 동행’이었고 ‘습관적인 동행’이었으며 ‘가까운 동행’이었습니다. 동행하는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노아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죄악된 말을 하지 않았고 죄악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죄악된 장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과 다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습니다. 술 마시는 사람과 같이 다니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십니다. 도박꾼과 같이 다니는 사람은 타짜가 됩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하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는 극도로 악한 시대였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창 6:11). 노아는 시대를 거슬러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동일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세상을 본받지 말고 시대를 거슬러 살아야 합니다. 시대를 거슬러서 사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된 삶을 산 것입니다. 


Ⅲ.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의를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 2:5). 노아는 120년 동안 산 속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왜 산 속에서 배를 만들고 있냐고 물어보았고 노아는 하나님이 큰 홍수를 내리실 것인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큰 배를 만들어야 된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여기며 무시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세상을 불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경고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1~12). 

이 세상은 불로 망할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망하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오직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살아남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서신의 두 가지 큰 주제는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동행하며 살라는 것(성화)입니다. 이 두 가지만이 불 심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결론 

인간은 네 가지의 영적인 상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무죄 상태’(state of innocence)였습니다. 이때 아담은 죄가 없었고 아담의 의지는 자유로웠습니다. 선과 악 어느 쪽이나 갈 수가 있었는데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함으로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둘째, 아담의 타락 이후 그의 모든 후손은 ‘죄악의 상태’(state of sin)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상태로 들어간 인간의 마음은 항상 악하게 되었습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2). 

셋째, 모든 인간이 죄악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의 상태’(state of grace)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넷째, 은혜의 상태로 이생의 삶을 살다가 죽으면 ‘영광의 상태’(state of glory)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상태에서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영광의 상태를 가리켜 ‘죄 짓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죄악의 상태에 있습니다. 죄악의 상태로 계속 있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은혜의 상태로 살다가 죽으면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죽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죄악의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상태 속에서 살다가 이 땅을 떠나 내생에서는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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