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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自足)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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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自足) (빌 4:10-13)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먼저 여학생들에게 20세기 초 위스콘신 대학이 있는 밀워키의 극도로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환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화상을 입거나 비극적 사고를 당해서 무서운 흉터가 생겼을 때를 상상하도록 했습니다. 상상하는 상황을 글로 묘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난 뒤 학생들에게 현재 자신의 삶의 만족도를 평가해서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에 따르면 학생들은 그 실험 이후에 자신의 삶을 실험 이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느낀다고 평가했습니다. 

뉴욕 주립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대상자들에게 ‘내가 000이 아니라서 기쁘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이 과정을 다섯 번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학생들에게 그 결과를 제출하라고 했더니 실험대상자들은 자신의 삶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만족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같은 실험을 다른 대상자들에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000이라면 좋을 텐데..’ 라는 문장을 완성하라고 같은 방식으로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험 대상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주 커다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어떤 것과 비교하는가에 따라서 평가가 바뀐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의 일들이 다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이 참 좋다, 저것은 좋지 않다, 이것을 하면 불행하고 저것을 하면 참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보면 다 별것이 아닙니다. 좋다는 것도 별것이 아니고 나쁘다는 것도 별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은 별 사람이 아니고, 참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사실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생각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좋을 수 있고 나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나쁠 수 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같은 사람도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나쁜 사람,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옹지마에 나오는 노인이 아주 대표적인 예입니다.

노인이 기르던 암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당시 말 한 마리는 한 가정에서 상당한 재산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말을 잃은 것은 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말을 가지고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도망쳤던 그 암말이 훌륭한 수컷 한 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암말을 잃지 않았다면 어떻게 수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할 뿐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노인의 아들이 그 수말을 타고 놀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수말을 얻지 않았다면 내 아들의 다리가 어떻게 부러질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말할 뿐 크게 마음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마음 아파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노인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 마을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불려나가 전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인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아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할 뿐 그렇게 좋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 마음의 관점, 내 눈의 관점, 생각의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안 좋은 환경 속에서도 만족하기도 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실제 가난은 ‘아! 나는 가난하다.’ 라는 마음이 먼저 있고 난 뒤 그 다음에 닥쳐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참으로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못난 모습이 많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은 긍정보다는 부정이 앞서고 많습니다. 만족하는 마음보다는 불만족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또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평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더 앞서고 더 자주 있습니다.

좋았던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았던 기억은 잠깐이고 나쁜 기억은 오래 간직합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했던 것, 오해를 받았던 것, 피해를 봤던 것 이런 것들은 오래 기억하지만 고맙고 감사한 일은 자주 잊어버리고 오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감사한 일과 감사하지 못한 일들이 같은 비율로 있다하더라도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할 일을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하고 감사할 일은 잠깐 기억하고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생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넘은 위대한 어른이 계셨습니다.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에 갇힌 자기를 섬겨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의 한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빌립보 교회가 자기를 챙겨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당시 감옥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환경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오래전 서울에 있는 어느 구치소를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난 후 성경퀴즈를 하고 답을 맞히면 조그마한 상품을 드렸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품을 나누어주려고 하다 보니 주는 상품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감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감옥에서 별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성경을 아예 통째로 외우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서 그들과 나누는 일은 참 좋았지만 몸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추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해서 같이 갔던 사람들은 전부 다 난방기가 돌아가는 따뜻한 자리에 있었고, 무릎 담요까지 받아 덮었지만 추워서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모릅니다. 겨울에는 물론이고 봄가을에도 팔꿈치와 무릎이 시리고 아파서 견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이니 그때 감옥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필요한 것, 아쉬운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런 바울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챙기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만은 챙겼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아예 바울을 섬기기 위해 교회 중직자 한 분을 보내서 바울 곁에 두도록 하는 조치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에 바울은 감사인사를 하면서 아주 특별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준 것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여러분들이 보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워서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보내준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12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공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고 말합니다. 

이때 바울은 ‘자족’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아우타르케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조건에 완전하게 맞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억지로 상황에 힘들게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어떤 여건에서든지 완전하게 맞출 수 있는 마음을 자족이라는 말로 씁니다. ‘배고픔도 괜찮고 배불러도 괜찮고, 풍부해도 괜찮고 궁핍해도 괜찮고, 비천도 괜찮고 존귀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쯤이야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대단한 것이 없고 아무것도 나를 힘들게 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우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찌푸리고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헤헤 웃는 사람이 아니라 새옹지마에 나오는 노인처럼 정말로 어른답게 넉넉한 심정으로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라고 말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런 넉넉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불행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족하려면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마워하려고 하면 고마워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려고 하면 감사할 것이 너무도 넘칩니다. 자녀들에게도 얼마나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는 자녀를 낳아도 기르는 도중 죽는 경우가 많아 몇을 낳았는데 몇만 남아있다는 말을 우리 시대까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얼마나 잘 자랍니까? 형편은 또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런 비결을 배웠으며 그런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웠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완전하게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먼저 알아야할 것은 바울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본래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비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싫어합니다. 배고픈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존귀함이 좋습니다. 배부른 것이 좋고 풍부한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렇게 힘들고 열악한 환경, 고통스러운 상황을 넉넉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또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가질 수 있었고 최고의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하나님이 있어서입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것도 바울을 정말로 힘들게 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고달픈 일들도 바울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바울에게는 시시하고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진짜 큰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의가 좋은 형제가 함께 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너다 동생이 물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물로 들어갔습니다. 금덩어리 두 개가 있었습니다. 동생이 건져왔습니다. 형제는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동생은 하나를 형에게 주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동생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동생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동생이 이야기합니다. “형님, 금덩이를 나누어갖고 보니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지 뭡니까? 형님만 없었다면 금덩이 두 개가 모두 내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형님이 미워지고 싫어지고 귀찮아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금덩이 때문에 형님이 미워지고 싫어지고 귀찮아진다면 그깟 금덩이는 없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형이 있는데 그 금덩이 때문에 우애가 깨지고 형이 미워진다면 그것은 없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도 금덩어리를 물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동생만, 형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 앞에 있는 잘못된 것, 나쁜 것, 우리를 해롭게 하고 어렵게 하는 어떤 것이든지 마음대로 없애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일체의 비결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견딜 수 있고 이겨나갈 수 있고 별 것 아니라고 시시하게 생각할 수 있고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있다면, 정말로 예수를 모시고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불행해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행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환경 때문에, 여건 때문에 좋아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모범이 없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모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확인하십시다. 불행이 어디서 옵니까?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옵니다. 우리 만족이, 행복이 어디서 옵니까? 결단코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풍부한데서, 일이 잘 풀리는 데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 거기서 우리 만족이 오고 행복이 옵니다. 세상 것에서 또 사람들에게서 잠시 올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에 끝나고 맙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과 말하고 주님 말씀을 읽을 때 거기서 행복이 오고 만족이 옵니다. 이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주님을 더 찾으십시오. 인생이 괴로울 때, 힘들 때 이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때 주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찾을 때, 주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항상 반응을 보이십니다. 어디에 계셨는지 어느 틈에 여러분의 손을 잡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환경도 여전하고 상황도 여전하지만 희한하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절대로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진짜 행복이 거기에 있고 진짜 만족이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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