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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위하여? (눅 4: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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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눅 4:21-30) 

<고향유정(故鄕有情)-처음에는 듣기 좋았는데>

오늘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에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성경을 여러 차례 읽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설령 이 말씀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가 이렇게 깊은 줄도 몰랐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제가 받은 은혜를 오늘 여러분도 그대로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나신 나사렛 고향에 가셨습니다.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 가셨습니다. 회당에는 고향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스타가 되셨습니다. 각색 병자를 고쳐주셨고 이전에 그 누구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한 신비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눅 4: 14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산지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유명해진 예수님이 고향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겠습니까? 아마도 기대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 컸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쭉 자라난 분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한국을 대표할 만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런 분이 모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우리 역시 기대와 자부심이 클 것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 교회가 저런 훌륭한 분을 길러냈다는 긍지 때문이지요. 

지금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일어나 성경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사야 61: 1-2절 말씀을 보란 듯이 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읽으신 뒤 자리에 앉으시자 고향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렸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이 고향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복음이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제 참으로 중요한 장면은 22절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들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자부심이 넘쳐흘렀습니다. “과연 우리가 소문에 듣던 대로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구나!” 이구동성으로 감탄했습니다. 22절을 보세요.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너나없이 감탄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은 예수님을 비꼬는 말이 아니라 친근감에서 나온 덕담입니다. 요셉이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는 칭찬이지요. 마치 우리 교회 출신의 훌륭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야, 아무개의 아들 참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셉의 아들이 참 대단하다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23절 이하부터 갑자기 바뀝니다. 따뜻했던 분위기가 일시에 싸늘해집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눈에 고춧가루와 흙먼지를 뿌립니다. 그것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진짜로 기대하는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진 속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Doctor, cure yourself!) 의사가 남의 병을 고치기 전에 자신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고 비아냥거리는 속담이지요. 

이 속담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보건대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고향인 나사렛에서 그대로 해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의사가 괜히 다른 사람을 고친다고 설치지 말고 자기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는 충고처럼, 예수님 역시 다른 동네 사람들의 병 고친다고 설치지 말고 고향 사람들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는 주문이지요. 나사렛 사람들의 이런 마음속에는 분명히 “네 고향부터 먼저 챙기라!”는 은근한 압력과 주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교회? 누구를 위한 목회자?>

여기서 우리는 교회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합니까? 목사는 누구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이 교회에 속한 교인들부터 먼저 돌봐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우리 교회나 우리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건대 교회가 꼭 내부에 있는 교인들만 돌보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고향 사람들만 위해서 봉사하시지 않고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섬겼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일차적으로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더 넓혀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위치한 인천, 대한민국, 온 세상을 위해 섬기기 위한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해서 교회의 녹을 받는 이들 역시 교인들이 헌금해서 나온 돈으로 월급을 받으니 꼭 교회 일만 하라고 못 박는 것도 잘못입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때로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더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 배우는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난 고향이라고 해서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기적과 봉사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향땅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혈연이나 지연, 학연과 같은 연결고리를 떠나 우주적인 마음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2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똑같은 고향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기대감을 품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만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달갑게 여겨질리 없습니다. 달콤한 칭찬을 기대하는 고향사람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니 누군들 좋아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을 먼저 돌보시는 하나님>

이제 25-27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기대를 정확하게 간파하신 후에 그들의 기만과 허위를 폭로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같은 분이 설교하시기에 딱 들어맞는 장소로서 나사렛 같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로 넘쳐 났습니다. 나사렛의 서쪽과 북쪽에는 페니키아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남쪽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서쪽에는 헬라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또한 나사렛를 비롯한 주변 동네들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의 영향은 거의 받지 못했고 오히려 이방인들의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에서는 정말로 경건한 유대인이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조롱한 것도 이러한 나사렛의 분위기를 그대로 압축한 말입니다. 이런 시기에 나사렛 사람들은 갑자기 유명해진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에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 혹은 성민의식을 다시 불붙여주기를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들의 지방색이 강한 민족주의적 기대와는 아랑곳없는 말씀만 하십니다. 구약의 두 경우를 예로 드는데 모두 선지자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먼저 돌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온 땅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도처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했을 때 엘리야는 이방인 과부를 먼저 돌봤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수많은 유대인 과부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엘리야는 유독 이방인인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또 한 경우는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 안에 나병환자들이 많았지만 아람, 즉 시리아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쩌자고 구약시대에 가장 큰 이사와 기적을 베풀었던 엘리야와 엘리사 두 선지자가 이스라엘 동족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먼저 돌봤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사렛 사람들이 고향부터 먼저 챙기라는 소리 없는 요구를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향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더욱 더 큰 기사와 이적이 고향과 동족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팔이 안으로 굽은 하나님이 아니라, 안과 밖의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어 무차별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혈연과 지연과 학연과 같은 좁은 틀 안에다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두지 말고, 우리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뜻과 계획 밑에다가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향무정(故鄕無情)-때로 입에 쓴 약이>

이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매몰찬 반응입니다. 먼저 28절을 보면 회당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나사렛 사람들이 크게 화를 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만일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듣고 나서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당연히 저는 두려워 할 것이고 장차 목회에 많은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진리와 생명의 말씀만 외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때로 청중들의 마음을 휘젓고 화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오늘 여기 성경에서 확인했습니다. 듣기 좋다고, 다 칭찬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때로 청중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때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실린 설교가 그릇된 회중들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듣기 좋은 설교만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게 만드는 설교도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사렛 사람들이 그렇지요. 자기들은 지금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더 큰 이사와 기적을 베풀어주기를 기대하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구약시대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돌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누구 말대로 뚜껑이 열렸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을 더 사랑하신단 말인가?” “우리가 이곳에서 와서 듣기 원한 말은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들, 특히 나사렛 사람들을 최고로 사랑하신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왜 자꾸만 이방인들 이야기만 하는 걸까, 이제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나사렛 사람들마저 망하게 할 작정인가?”, 하면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산 낭떠러지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지요! 오늘 읽은 22절에 보면 나사렛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께 호의를 보였습니다. 감탄해서 덕담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생판 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을 안 하니까 화를 내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친구가 원수로 급변한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칭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달콤한 이야기로 재미있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때로 청중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웨슬리가 설교했을 때 사람들이 격분해서 두 사람을 해치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귀에 달콤하게 들려온다고 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때로 화나게 만든다고 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말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교회는 진리의 반석 위에 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내 기대 밑에 두는 교회가 아니라 내 기대를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밑에 두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교회는 교회에 다니는 이들만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땅 끝까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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