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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증인으로 살자 (눅 24: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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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으로 살자 (눅 24:44-49)


부활절이 2주 지났다. 그런데 요즘 부활절은 행사개념이 많아서, 부활절이 끝나면 부활설교도 부활찬송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활은 간단한 행사로 보내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절기다. 우리 성도들의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이유는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었고, 죄가 없기에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받고, 부활한다는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승천하기 전에 남긴 메시지다. 그러기에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메시지다. 내용은 한마디로 하면,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증인될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하나? 

1. 구약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길가에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본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목격자의 증언이 있어야,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있다.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경우를 당할 수 있다. 
‘증인’(마르튀스)은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 사기다. 자기가 맡은 일을, 하지 않으면, 이를 직무유기라고 한다. 보고 들어서, 분명히 알고 있는데,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다. 

그래서 사도들은 직무유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우리도 성경에서 보고 들은 예수님을 전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시간 차이로 보면, 약1,600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되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은, BC 약1,500년경에 기록된 것이고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은 AD 약100년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많은 시간적 차이가 있는데, 놀랍게도 초점이 하나에,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성경 어느 곳을 봐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전체에, 예수 그리스도는 가득 차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부터, 모세오경, 역사서, 선지서, 시가서, 모든 성경이 예수님이 온다고 예언과 노래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이 어디서 탄생할 것인지, 어떻게 오실 것인지, 더 나아가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자세히 기록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보자.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에 탄생한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한 분이다. 예수님 밖에, 이런 분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했다. 처녀가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며,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을 것을 예언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구약을 읽으면,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기록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700년 전의 기록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언급했다.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부활이 가득하기에, 눈을 열려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시편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처럼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눈을 열어서, 성경을 깨달아, 증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구속의 은총,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쩌다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속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알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된다고 믿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믿은 자로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이 땅에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중심 사역은 고난당하고 부활한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이기에, 부활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이 사역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된다. 그래서 (47上)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예수님이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사역은 무엇인가? 

(요10:10下)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의 사역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도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증인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 

자식이 일류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인가? 큰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인가? 내 학위논문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인가? 투자한 주식이 갑자기 뛰어, 거금을 손에 쥐게 됐다는 소식인가? 아마 보통은, 죽을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일 것이다. 병이 치료되면 뭐하는가? 
늙으면 결국 모두 다 죽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병든 몸으로 오래 살면 뭐하는가? 따라서 의인으로 서느냐, 죄인으로 서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자기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용서받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복음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먼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홀로 구원받고, 홀로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증언을 통해,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47中-48)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 증인인가? ‘너희는’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구원을 받고, 천국을 있음을 믿는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행2장)에 나온다. 오순절을 맞아서, 각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때 청중들을 향해, 베드로는 큰소리로 설교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대로, 예수님을 보냈는데, 너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했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 명료했다. 베드로는 거침없이 외쳤고, 사람들은 찔림 받았다. (37)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했다(38). 그래서 그날 침례 받은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다(41). 

베드로에게 어디에서, 이런 능력이 나타났을까? 그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했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가장 힘 있는 설교내용은, 예수, 십자가, 부활, 성령이다. 복음의 핵심내용이기 때문이다. 전도할 때도 간단하면서, 복음이 축약되어야 잘 전달된다. 
설득력 있는 대화는, 간단명료함이 들어있는 대화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전도한다. 증인은 물론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이,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배척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 복음의 내용에, 다른 것을 희석하거나, 변질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이, 각색되고 희석되면, 이는 복음의 변질이다. 이런 마음을 먹으면, 상대방에게, 직선적인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대부분 거부하거나,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자의 삶을, 영적싸움에 비유하였다. 전도는 전투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성령님이 하실 일이다. 우리는 물주고 가꿀 뿐이다. 자라나게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이다. 매사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는 달변가가 아니다. 용기도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설교할 때, 3천 명씩 변화되어, 침례를 받았다. 베드로가 말을 잘 해서인가? 아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수, 십자가, 부활, 성령이 말하여 질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3. 예수님은 증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준다고 약속했다(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왜 택했나?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막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가르쳤고, 예수님의 삶을 보고 배우고, 부활을 체험하여,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래서 보내서,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힘으로, 지식으로, 할 수 없다. 주님의 권능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면서, 증인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실제로 오순절 날 제자들은, 불같은 성령을 체험한다. 능력을 덧입었다. 그 결과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어떤 능력인가? 성령은 사람을 변화하게 만든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모르다고, 3번씩 부인한 베드로는, 성령 받은 후에, 딴 사람이 된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핍박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울은 살기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다. 
예수 믿는 자들이, 다메섹에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그때 성령을 체험하고, 완전히 변화된다. 위대한 하나님의 증인이 된다. 성령이 사악하게 핍박 자를,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했다. 성령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킨다. 

교회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 한국교회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변화되어, 쓰임을 받았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분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님이 주는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권능은 뒤나미스로, 뒤나마이(가능하다)는 말에서 왔다. 

하나님이 주는 권능이 있을 때,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다하게 된다. 그 능력은 학력이나 지식이나, 명예에서 나오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임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다. 그 능력을 받으면 힘이 솟는다. 그 능력을 받으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난다. 하나님을 섬기는 맛이 달라진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찬송소리가 달라진다. 기도시간이 뜨겁게 달라진다. 교회 나오는 발걸음이 달라진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나요? 그 능력의 원천인, 성령 충만이 없어서 그렇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렇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은 노력해서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주는 힘으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증인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안다.”며, 경험을 말하는 사람이 증인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경험해야, 증언할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경험하면, 성령의 불덩어리가 되어, 당당하게 주님의 부활을 중거하게 된다.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주인공을 찾고 계신다. 주님은 그 거룩한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 

결론이다. 1903년 레닌은 17명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1917년, 4만의 공산주의자들을 데리고, 러시아를 정복했다. 한 때는 세계인구, 3분의 1이상 정복했다. 또 많은 사람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나? 그들이 전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공산주의자가 된, 한 젊은이가, 자기 약혼녀에게 파혼을 결정하고 쓴 편지가, 여기에 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사망률이 높다. 총살이나 교수형을 당하고, 조롱을 받으며,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온갖 좋지 않은 것을 다 당한다. 

우리는 빈곤 속에서 살며,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남김없이 번 것을, 당에 바친다.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 하는데, 정말 우리는 광신자들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세계 공산화를 위한 투쟁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 나의 종교, 나의 취미, 나의 애인, 나의 아내, 나의 빵과 고기다. 낮에는 그것을 위해 연구하고, 밤에는 그것에 대한, 꿈을 꾼다. 공산주의는 나를 인도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다. 나는 이 신념 때문에, 이미 감옥에 간 일이 있고 만일 필요하다면, 사형대 앞에도 설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면 세계 복음화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를 위해서도, 그렇게 헌신하였을 때, 지구촌 1/3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받았다. 이 생명의 복음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나? 
주님이 바라본 그 땅 끝은, 어디에서 실현될 것인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에서부터, 땅 끝은 정복될 것이다. 성경을 알고, 성령을 받아,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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