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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나타나신 주님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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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타나신 주님 (요 21:1-14)


살다보면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데 결과가 별로 신통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였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나오면 얼마나 당황합니까?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기대한 만큼 매상이 오르기는커녕 적자가 쌓일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아무리 수적인 성장보다 성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교인들의 숫자가 늘지 않을 때 목회자가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제자들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역을 지켜보고 자기들도 전도 현장에 직접 나가 실습도 하며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늘 함께 계시던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그들은 지난 몇 주 동안 낙심, 좌절, 불안함 속에서 보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갈릴리에 오기는 왔으나 여전히 마음이 허전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나와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셔서 사역을 감당할 준비를 시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부활하신 첫날 저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평강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자신의 생기를 제자들에게 불어넣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십니다. 주님이 처음 오셨을 때 마침 도마가 없었기에 팔일 째 되는 날 두 번째로 오십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안을 선포하시면서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7)고 하십니다. 도마가 가졌던 의심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때 도마는 어느 누구도 해보지 않은, 요한복음의 절정을 이루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주님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하시면서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가 더 복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이 나도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추가합니다. 제자들은 깨어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기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두려워 도망을 가고 예수님을 배신하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습니다. 

실패와 도주와 상심으로 무너진 제자들, 특히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격렬하게 부정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든지 자기가 뜻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낙심한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제자들처럼 처음 부르셨던 때의 감격을 되새기며 사명감을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네 오른 편에 던지라” 

본문은 “그 후에”로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셨던 그 후에. 장소는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옮겨집니다. 티베리아 호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에 붙인 이름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지방에 온 이유는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라’(마 28:16)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처음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더불어 많이 사역하던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실도 믿어지고 예수님이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도 알고 있으나 삼 년이나 항상 같이 계시던 예수님이 안 계시니 허전합니다. 지금 갈릴리 호수에 누가 나와 있습니까? 시몬 베드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 전부 일곱 명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섭니다. 왜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녀보았자 별 볼일 없으니 다시 고기 잡기를 원함입니까?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옛 직업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베드로가 불과 며칠도 안 되었는데 예수님께 주신 사명을 마다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고기를 잡아 생활비를 마련해보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무엇인가 해야 될 것 같기에 호숫가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보통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3년 동안 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이 호수의 사정을 잘 알았고 고기 잡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새 날이 밝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해변에 서서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람이 주님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님은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처럼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문법적으로 No를 전제로 던지는 부정의문문으로, 직역하면 ‘너희들은 고기를 못 잡았지?’ 제자들은 No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그물을 던졌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고기가 어찌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제자들의 빈 그물은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그물을 당기다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은 문득 전에 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누가복음 5장 1~11절에 의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밤새 그물을 던져 보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일할 기분도 나지 않고, 밤새 그물을 던지느라 육신이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 아침에 그물을 씻으며 다음번 출항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으로 볼 때는 분명히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선생님의 말이니 한번 던져보겠다는 시큰둥한 자세를 보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배를 깊은 데로 몰고 가서 그물을 내리는데 갑자기 그물이 팽팽해집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베드로가 요한과 야고보가 타고 있던 배에 손짓을 하자 그들이 급히 노를 저어 왔습니다. 두 배에 탄 어부들이 그물을 함께 잡아당기니 두 배가 물에 거의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압도된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조금 전까지 ‘선생님’ 하며 예수님을 부르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회개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베드로가 지금까지는 고기를 낚는 어부였으나 장차 복음을 전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배와 잡은 고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요한이 해변을 다시 보니 정말 주님이 서계십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이 외치자 그물을 열심히 당기던 베드로도 주님임을 알아보고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듭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을 당하여 열심히 달려가던 베드로가 지금은 동트는 새벽에 갈릴리 바다에 뛰어들어 주님을 향하여 열심히 헤엄을 칩니다. 배와 육지 사이의 거리가 오십 칸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원어에는 200 규빗으로 나와 있습니다. 한 규빗 45cm 이므로 200 규빗은 90m. 100 야드는 바로 미식축구 경기장의 길이입니다. 당신을 향하여 헤엄을 쳐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주님은 물끄러미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식탁 

일곱 명이 달려들어도 그물을 끌어당기기 힘든 상황에서 베드로가 빠지니 더 이상 그물을 당길 수 없어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매단 채 노를 저어 해변으로 나아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불 위에 생선이 익고 있었고 그 옆에는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전과 달리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물고기의 숫자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분명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불에 구우신 생선은 헬라어로 ‘옵사리온’인데 ‘말린 물고기’ 혹은 ‘절인 물고기’를 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선을 가져오라 하실 때는 ‘익쑤스’ 하여 일반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그 결과 그날 아침 주님이 준비하신 식탁에는 말린 생선과 싱싱한 생선 두 종류가 놓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주십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에 예수님이 광야에 있던 무리들을 위하여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배불리 먹이시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때 광야에서 음식을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누는 식사 자리는 조용합니다. 아니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이 아직도 싸늘한 아침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과 생선을 받으면서 그들은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먹은 음식은 사실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예수님이 구워주시는 떡과 생선을 먹으며 또 하나의 숯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8).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대제장의 뜰에 피웠던 숯불 앞에서 한 하녀의 도전을 받고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눅 22:57)고 우기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해변의 숯불 앞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대답합니다. 그 아침에 주님이 주신 떡과 생선을 먹은 제자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들의 여생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원수들의 시선은 우리를 노려보고 우리의 허물어진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문제점을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떠벌이고 손가락질 합니다. 우리들은 남의 과거를 들추거나 가십으로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의 현재의 새 출발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남의 실수를 잘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도 신실했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낯 뜨거운 순간들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범한 죄를 모른척하거나 죄를 미화시키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최선의 순간들도 잊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신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입니다. 이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온전치 못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끈질긴 사랑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낙심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방황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2)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것을 인하여 심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배반하고 도망갈 수 있느냐고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따뜻한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헐레벌떡 달려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내 모습을 주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불평, 불만을 일삼고 있는 내 모습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셨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때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으로 감싸셨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조차 개인적으로 찾아올 때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잘못을 지적한다고 모두가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변화는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깨닫는 순간 일어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죄를 지었으냐’ 책망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 

돌을 치려하는 자들을 인하여 아무런 감동이 없던 여인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 앞에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의 것을 착복하였느냐’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오늘 네 집에 가서 함께 식사하겠다 하시며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너는 잘못된 인생이야 너는 도둑놈이야. 민족의 배반자야’사람들이 비난을 할 때 꿈적도 않던 삭개오가 주님의 사랑의 말씀 한마디에 녹아져서 자기가 강제로 빼앗은 물건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고백합니다(눅 19:8). 

우리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잘못을 지적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쌀 때 일어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느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섣부른 지적은 비난이 되고 정죄가 됩니다. 사랑이 결여된 지적은 도리어 관계만 나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입니다. 법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법조항을 엄격하게 만든다고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다스려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면 삶의 현장에서 그 받은 사랑을 지혜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3)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열심히 던졌으나 허탕을 친 것은 지난 삼년 동안 그물을 던지지 않아 고기 잡는 요령을 잊어버렸거나 갈릴리 호수에 고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한 그물에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가 걸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 제자들이요, 여전히 그 그물이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그물을 던졌느냐 들은 후에 던졌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더니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좌절에서 벗어나 풍성한 열매를 거두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순종은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똑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해결하는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는 일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이민자로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내 꿈과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주님이 다 먹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의 삶만을 추구하는 자는 욕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이기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인하여 아무리 즐거워해도 세상을 마감할 때 웃을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주님 앞에 면목 없이 선다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주님께 순종할 때 실패가 성공으로 바뀝니다. 좌절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US Coast Guard의 Motto가 있습니다. “You should go, but you don’t need to come back.”이 모토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주신 사명감에 불타는 인생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집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미한 가운데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베드로 때와 달리 지금은 주님이 직접 나타나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배우면서, 설교를 듣고 기도하면서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하며 풍성한 감사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순종할 때 그 교회와 가정은 든든히 섭니다. 

갈릴리 해변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깊은 인연이 얽힌 곳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해변에서 여러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해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해변은 제자들에게 헌신의 첫 걸음을 기억하게 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와 만나시면서 수치와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하여 세 번 아니 열 번이라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가치 없는 자들, 실패한 자들, 미련한 자들, 배반한 자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부활 생명의 주로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 인생의 갈릴리 해변에 서 계십니다. 

그 해변에서 피 흘린 손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아침상을 차려주십니다.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는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가장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표현하기 원하십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서먹서먹한 부분이 있습니까? 교인들 간에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까? 삶 속에 풀리지 않은 문제, 혼자서 고민하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한 상처 때문에, 혹은 현재의 나의 상황은 누구 때문이라고 하며 아직까지 분노하거나 방황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각자를 향한 사명을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팀워크를 이루며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채워 주시는, 찢어지지 않는 풍성한 복을 가정과 사업과 사역에서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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