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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송하리로다! (엡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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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엡 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 찬송하리로다(3,6)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는 3절부터 14절까지는 한편의 찬송시입니다. 이 찬송시는 마침표가 없이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한 번 터지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단번에 14절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찬송하는 인생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4절에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요리문답 제1조에서는 “사람의 제일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찬송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찬송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찬송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 하루가 찬송으로 시작하고 하루의 마침이 찬송으로 마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찬송으로 마치길 바랍니다. 찬송만 살아 있으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만 살아 있으면 어려움이 닥쳐도 괜찮습니다.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연인 얼굴만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찬송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만 생각해도 찬송이 우러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469장) 그냥 걸어가다가도, 일하다가도 찬송이 우러나옵니다. 가슴이 밋밋하고 건조하고, 찬송 부를 마음이 없다면 벌써 문제가 붙은 것입니다.

이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냐, 살아 있는 교회냐를 측정하는 방법도 단순합니다. 찬송을 들어보면 압니다. 늘어지고 맥없이 찬양을 부른다면 그 교회는 죽어 있는 교회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느리게) 이러면 죽은 찬양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빠르게) 찬양은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걸어가는 뒷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씩씩하고 힘차게 걷는 사람은 할 일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찬양을 잘못하는 편입니다. 특히 박자를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열정적으로 부릅니다. 느려지는 찬양은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 영적인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이 늘어지는 찬양을 부르면 어디 싸움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이 죽어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기력하다는 증거입니다.

느린 군가 보았습니까? 서정적인 군가 보았습니까? 저는 가끔 큰 교회의 찬양집회에 갑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찬양을 부릅니다. 박자나 리듬이 현란해서 저는 잘 따라가질 못합니다. 가끔 옛날 찬양이 나오면 좀 따라 부를 수 있는 정도지요. 그런데 요즘 ‘경배와찬양’ 류의 찬양을 보니까 문제가 찬양의 전투성과 영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회의 찬양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에 군가처럼 빠르고 씩씩해야 합니다. 그런데 찬양들이 너무 감상적입니다. 또한 영성이 없습니다. 찬양의 기교나 테크닉은 현란해져 감정은 건드리는데 우리 속 깊은 곳의 영혼의 샘은 건드리질 못합니다.

찬송은 축복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기도가 막힐 때 찬송을 부르면 답답했던 영혼이 시원해집니다. 옛날 신앙의 어머니들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습니까? 남편은 무관심하고 폭력적이고, 집안일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나면 얼굴이 밝아집니다. 새 힘이 납니다. 이게 찬송의 힘입니다. 저는 기도가 안 되면 찬송을 부릅니다. 한 30분 정도 찬송을 하고 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예배 때 은혜 받는 비결을 말씀드릴까요? 찬양을 순서에 맞추어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열정적으로 해 보십시오. 그러면 은혜 받습니다. 어느 음악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낙담한 합창단원을 본 적이 없다” 찬양을 많이 하면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가족예배를 드리는데 가장 신날 때가 찬양을 부를 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힘차게 찬양을 부르고 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힘이 솟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항상 찬양이 살아 있는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2.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3,5,7)

찬양을 하긴 하는데 찬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합니다. 새해 인사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니다. 복조리도 걸어 놓기도 하고, 입춘에는 ‘입춘대길’이라고 대문에다 써 붙여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복을 너무 좋아해서 전도할 때도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하며 전도합니다.

대체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이라고 할 때 복은 물질의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등 현실적인 복들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신령한 복’이라고 할 때 과연 이런 복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해서 병 걸리지 않고 장수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해서 환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또 악인이 부자로 오래 사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주변에서 봅니까?

그런데 사실 예수 믿으면 이런 복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술 담배 안 하지요. 주일 잘 지키지요. 기도하고 말씀 들으면 정신 건강에 좋지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스트레스가 해결되지요, 또 사람이 봉사를 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남을 섬기고 배려할 때 신기한 것은 우리 몸에서 면역항체가 분비된다는 의학적 보고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살게 됩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하면 평균수명이 7년이 더 늘어난다고 까지 합니다.

또 신앙의 3대는 대부분 잘 삽니다. 주변에서 한 번 보세요. 가난한 사람 거의 없습니다.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목사입니다.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고, 프린스톤 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문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해 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이었습니다.

대단한 가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가문을 축복하십니다. 저도 여러분 한 가정 한 가정을 놓고 기도할 때 다른 기도 보다 이런 물질적인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업을 불같이 일으켜 달라거나, 시온의 대로가 열리게 해달라거나, 가족이 평안하고 건강하게 해달라는 기도들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은 그 복이 아닙니다. 신령한 복, 곧 영적인 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죄 사함 받은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삶입니다. 이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만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게 복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으로 채워야 복이라고 말하는데 성서는 그것은 다 부질없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물질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집을 사도 감사하고 기쁜 것은 잠깐입니다. 곧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고 다른 부족한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30평이든 50평이든 100평이든 인간은 잠간 행복할 뿐이지 더 이상의 만족은 없습니다. 이런 물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복의 개념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는 하늘을 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무언가 물질적인 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는 복의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아직도 물질 때문에 우리 신앙이 쓰러지고, 또 물질 복 주면 ‘할렐루야’하는 신앙이라면 아직도 어린 단계의 신앙입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합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을 하는데 물질을 보고 결혼하는 사람과 사랑을 보고 결혼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산, 학벌 등이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과 오랜 사귐을 한 연후에는 그 사람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사람’만 원합니다.

그 분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분만 원하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항상 그 ‘무엇’만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오늘 아침, 또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그 게 복입니다. 다른 데서 복을 찾지 마세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지로서 체험했느냐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복입니다.

죄사함의 복은 또 어떻습니까? 인간은 죄를 짓고는 살 수 없습니다.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그 피 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의 고통은 죄를 지어 본 자만이 잘 압니다. 다윗은 시편 32편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노래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라고 고백할 정도로 죄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기억력이 없다는 것이 복인 것 같습니다. 과거를 다 기억하고 살면 괴로워서 못삽니다. 잊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 때에 천국과 지옥을 하나님께서 굳이 판결하실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 인생의 지나온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앞에 떳떳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전부 제 발로 지옥 가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죄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를 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사함의 복입니다. 7절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허물 많고 더러운 사람들인데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맞아주셨습니다. 이제 신부의 허물은 신랑의 허물입니다. 신부의 문제는 이제 신랑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와 예수님이 연합을 이루어 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복입니다.

다시 한 번 진정 신령하고 영원한 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복이라 하지만, 믿는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 사함을 받아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복입니다.

3.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4)

그런데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내가 예수 믿기로 결단할 때가 아니요, 이성이 생긴 연후도 아니요, 모태에서도 아니요, 창세 전에 결정된 일입니다. 이는 이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철두철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은혜의 풍성함”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의 산물이라면 불안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결단이며 의지이기에 결코 무너짐이 없습니다.

예정론은 인간을 혼란 가운데 몰아넣는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찬송이 넘치게 만듭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사회에서 소수입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은 이 힘없고 연약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교리입니다. 우주의 기초를 만들기 전에, 그것이 수만 년 전이든 수억 년 전이든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여러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건과 인연의 실타래 끝에 여러분을 이 날 이 때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렇게 예수 믿게 하여 영광스런 존재로 만드셨다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가 아니요, 영원히 기억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유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예레미야가 자기 의지로 선택하기 전에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자기 하는 일과 자기 인생에 대한 강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일에 대해서 이런 강한 프라이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일을 시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런 예정은 우리로 든든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은 운명이나 무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한 번 고백하며 시작하십시오. “오늘 하루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실까? 나에게 어떤 만남을 갖게 하실까?” 어려움을 당할 때는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또 무슨 일을 하실려나?”

예정은 그래서 우리로 겸손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각본의 한 역할을 맡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은사도 내 물질도, 내 시간도 다 내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깐 맡기셨고 이제 그분이 주라 명하시니 돌려드립니다.” 자기 것 아까와 하며 “제 것입니다. 제가 절망 공들여 수고한 것의 일부입니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입니다”는 단어가 입에 붙어야 합니다.

예정은 또한 우리로 선택받은 자의 의무를 다하게 만듭니다. 4절과 5절을 다시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과 예정이라는 단어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란 단어를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서 함부로 살 수는 없지요. 거룩하기를 힘쓰고, 세상에 흠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만약 우리가 함부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정됐으니까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도공이 그 오랜 세월을 구상하고 작품을 빚어 가시는데, 스스로 그 작품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된 여러분 세상에 나아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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