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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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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합니다 (요 21:15-18)
   
오늘의 교회력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해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이 되면 즐겨 사용하는 설교본문이 요한복음2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한 주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제8일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1명의 제자들 중에 7명이 제자들이 함께 고기를 잡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7명의 제자들 중에는 시몬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란 사람은 바돌로매라는 제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 다만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하여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두 분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을 기다리면서 소일 삼아 고기를 잡으러 간 것 같습니다. 영원히 어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서 배에 올라 그물을 내려 보았지만,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눅5장에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다음 날 아침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셨지만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 3년 전 그 때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는데,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배의 오른 편에 던졌는데, 잡힌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다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록하는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쓰기가 거북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벗고 있었는데, 사랑하시는 제자가 저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하니,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려 수영하면서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 200 규빗, 약 100m쯤 되었기에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펴 있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렸는데,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한 번에 잡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7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와서 아침 식사를 먹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셨기에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물어보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져다 제자들에게 주시고, 구운 생선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였습니다. 부활하신 첫 날에 10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한주간이 지나서 도마까지 함께 있을 때에 나타나셨고, 이번 갈릴리 바닷가에서 7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10명의 제자들, 11명의 제자들, 7명의 제자들,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신 것을 합하면 12번 정도 나타나셨습니다. 

4복음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나신 것들을 날자 별로 정리를 하거나 시간대 별로 짜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 자체가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사건이기에 4복음서에 흩어진 여러 사건들을 억지로 짜 맞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만, 항상 마음에 무겁고, 예수님 뵙기에 두렵기만 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제자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라는 제자는 항상 선두에 서야 하고, 자기가 제자들 중에 가장 수제자라고 믿었고, 신앙고백도 먼저 해야 하고, 어떤 다짐이나 결의도 먼저 하였고, 항상 선두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도 다혈질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다 실수도 많았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칭찬의 말씀을 주시지 않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힘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예수님은 가룟유다에 팔리고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어 휘둘렀습니다. 베드로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대제사장의 하속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가 잘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낫게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다른 제자 한 사람과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제자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다른 제자 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대제사장의 집을 드나든 일이 있어 문을 지키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날이 추운 관계로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 하나가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었는데, 그 종이 와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첫 번째 부인은 그냥 부인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니, 점점 더 강도를 세게 해야만 곧이들을 것 같아 저주하는데 맹세도 하고 저주도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여러 날 통곡하고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는 실패자요, 배신자요, 얼굴을 들고 주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곧 우리의 실패요, 베드로의 상처는 곧 우리 모두의 상처입니다.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사람입니다. 

지금 갈릴리 바닷가에서 7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허기진 제자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며 지친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데, 먼저 섬기시고 있습니다. 추운데 불을 피어놓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책망은 뒤로 하고,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세 번 부인한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상처투성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도 소망도 용기도 긍지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붙잡아주시면 일어날 것이고, 주님이 나가라고 하시면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일어나 예수 공동체에서 떠나야 할 판이었습니다. 병들고 상처받아 지친 영혼을 향하여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말씀은 여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 있는 배나 그물이나, 생싱한 고기와 같은 이런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심에 우열을 가린다고 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지만 낙심한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하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위신을 회복시키고 기운 차리게 하여 수제자의 반열에 돌아오게 하시고 있습니다. 

시몬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사랑이란 말은 ‘아가파오’라는 말인데,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필레오라는 사랑은 우정이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은 그리스어가 아니라, 아람어였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달리 사용한 것뿐이지, 같은 의미로 말하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하였고,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베드로에 다시 “내 양을 치라”고 이르셨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세 번을 같은 말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였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로 부탁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먹이고 치라는 말을 억지로 구분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먹이는 것과 치는 것은 같은 범주에 속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백성들을 어린 양으로 보셨습니다. 나약하고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앞날을 내다보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배신한 제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마디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또 나를 배신할거냐?” “그렇게 목숨이 아깝더냐?”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줄 믿느냐” 그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에 걸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기에 “저는 주님을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얽매여 사랑하는 제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답은 예전에 사랑한 사람이라느니,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 오늘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영성이 치유되지 않으면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질문하고 확인하면서 주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있습니다. 

요13:36-37에서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고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역시 세 번의 질문과 확인으로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서 다시 수제자의 반열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순교할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는 근심하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보여드릴 수 없어 근심하였습니다. 왜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우리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면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어쩌다, 생각나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사랑해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어린 양들이라고 하지만 다 귀엽지가 않습니다. 다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들이라고 하는데, 다 양들이 아니라, 뿔나고 모난 염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목양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소명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헌신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도 주님을 사랑할 때에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고백 한 마디가 질병을 이겨내고, 절망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도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위력은 정말 위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실패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있었지만, 우리 주님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가는 참으로 저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십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셨습니다. 한량없는 은혜요,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건강, 물질, 명예, 모든 것을 동원하여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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