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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요이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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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요이 1:4-6)

: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이 땅에 계속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사람을 죽일 권한은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하였습니다(요 18:33). 빌라도에게 중요한 관심은 그가 로마의 반역자냐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하셨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다시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히 자신이 왕이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왕이로되, 빌라도가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인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의 왕이라는 하셨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요 18:38). 빌라도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을 도모하는 정치범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에게 듣지 못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그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진리는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진리가 밥 먹여 주냐?”고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대제사장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너는 한가하게 진리 타령이나 하고 있느냐!”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 안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니 어쩌니 하는 것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밖으로 나가서 유대지도자들에게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한갓 어수룩한 몽상가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 분이 진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 이 분이 진리라는 것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계심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또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믿으면서 그 말씀을 진리로 믿지 못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믿겠다면서 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믿는 것은 그 말씀을 또한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믿으면서 그 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진리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어떤 기쁨을 가지고 있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I. 기쁨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요한에게는 어떤 기쁨이 있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인사를 끝낸 사도 요한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기쁘도다[caivrw/카이로]’는 말은 ‘유쾌하게 되다’, 즉 ‘행복하다’, ‘매우 기뻐하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심히[livan/]’ 즉 ‘대단히’, ‘몹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라는 말까지 붙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는 얼마나 기뻐하는 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기뻐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은 진리를 쫓아서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에서 ‘행하다[peripatevw/페리파테오]’는 말은 본래 ‘돌아다니다’는 뜻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는 것처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돌아다니는 것은 곧 그의 삶입니다. 즉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은 도적놈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은 의로운 삶입니다. 전도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은 전도를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는 진리를 모시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보는 것을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행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1. 진리를 행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사도의 기쁨이었습니다. 요한삼서에서도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삼 1: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사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에는 진리를 행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진리를 행하여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진리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행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됫박으로 덮어 둔 빛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예수님을 심문하였던 빌라도처럼 진리에 대하여 코웃음 치는 시대입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학에서 조차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보다는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가리키는데 급급하고 있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취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땅의 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살림이 넉넉하여지고,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고민하여야 할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믿지만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다는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여야 할 것은 자신의 믿음이 실천이 없는 죽은 믿음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근엄함과 엄숙함은 있지만 기쁨과 감격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는 실천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기쁨과 행복을 위한 실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목마르게 찾는 이 세상에 기쁨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우선 따라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이 요구하는 실천하여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사도의 간청을 봅니다.

  
II. 간청
  
사도 요한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하다[ejrwtavw/]’는 말은 ‘질문하다’, ‘간청하다’, ‘빌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지금 사도는 이 말씀을 받는 이에게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입니까? 사도느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새]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모든 교회에게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간절하게 요청합니다.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도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로써 진리를 따라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가장 우선할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가 바로 ‘서로 사랑’입니다.

1. 서로 사랑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요한은 요한일서 3:1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주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교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여야 한다는 설교는 듣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의 우리에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 당시의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간절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일에 서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숙달된 사람에게는 사랑하라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 당시의 사람이나 우리나 모두 사랑하는데 서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일에 서투른 바로 그 인간들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것을 친히 보여주면서까지 우리들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시범을 보여 주시고 너희도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앞서 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몸짓을 하여야 합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는 진리를 알았기에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저 사람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이 될 것이다.’고, ‘나는 충분히 사랑할 마음이 있는데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서로 사랑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랑은 처음에는 모두 짝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우리를 짝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서툰 사랑을 이제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서로 사랑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특히,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며칠 전, 제 사무실에 오신 어느 분이 “요즘 우리 지역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소일거리가 없어서 걱정이다. 어르신들이 건강식품이나 의료 기구를 파는 곳에 가서 하루 종일 지낸다. 그러다가 약효도 검증되지 않은 약을 수십만 원 어치씩 사기도 하고, 수백만 원짜리 기구를 사서 자식들과 갈등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회문제가 되어 저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제게 흥미로웠습니다.

어르신들이 그런 곳에 가서 비싼 약을 사고, 고가의 기구를 사는 것은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속는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말끔하게 생긴 사람들이 “어머님! 어머님!”하면서 착 달라붙어서 살갑게 군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보다 훨씬 친절한 아가씨들이 “아버님! 아버님”하면서 비위를 맞춘다는 것입니다. 이 아양에 알면서도 속는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친딸도 하지 않는 말을 그곳에 가면 그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면서 속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오래 전, 다른 분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남자들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장님, 사장님!’하면서 달려들면 속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왜요? 집에서 마누라의 바가지에 지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위 꽃뱀에게 물린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집에서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구박만 받았는데 ‘싸모님, 싸모님!’하면서 달려들면 ‘나라고 못할 소냐!’하면서 제비와 함께 봄바람을 탄다는 것이랍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배워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누구에겐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나 다른 교인에게 상처받고 위로받으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조건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사악한 꼬임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서서히 자기만족을 즐기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에 듣기 좋은 말도, 세상없는 사랑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꾸며낸 것이라면 ‘거짓 사랑’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름 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입니다. 사랑을 원하는데 진짜 사랑이 없으니 가짜 사랑에라도 알면서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해서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뼈아픈 일입니다. 이단에 빠져서 영적으로 방황하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안타까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을 보면서 경각심뿐만 아니라 진정한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503장 2절) 

우리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건강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랑의 실천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계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III. 계명
  
여기에서 계명은 십계명과 같은 의미의 계명은 아닙니다. 더욱이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여야 할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계명[ejntolh/엔톨레]’이라는 말은 4절과 5절에 각각 한 번, 그리고 6절에 두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계명은 권위 있는 명령을 가리킵니다. 즉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또한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계명입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1. 사랑을 계명으로 따라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 말씀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새로 만들어진 계명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실천하는 것이기에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2 말씀입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도덕폐기론’도 주의하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의무라기보다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여야 할 의무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리이자 또한 사랑이십니다. 진리는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요,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에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제 부족하고 서툴지만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길이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시다.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시다!”(서로에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위대한 사랑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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