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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성도가 됩시다 (2) (행 4: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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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성도가 됩시다 (2) (행 4:23-37)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를 믿게 되면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담대함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부각될 때,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두 사도가 바로 이 사랑을 경험했기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거침 없이 공회원들을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공회원들은 두 사도의 담대하고도 의연한 태도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위협한 후에 풀어주고 말았다. 

풀려난 두 사도는 즉시 자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두 사도의 석방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도는 그곳에 모여 있는 동료들에게 되어진 일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이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크게 고무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도를 붙들고 계셨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리 중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도의 석방으로 말미암아 그런 염려나 원망은 일순간에 없어졌고 교회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두 사도의 석방으로 인해 더욱 새로워진 예루살렘교회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기도하는 교회

1) 합심 통성기도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한마음으로” 이 기도를 합심기도라 한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이 기도를 통성기도라 한다.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모습은 합심기도, 통성기도다. 개인으로 기도할 때는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이면 합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겠다.” 

언제 소리를 크게 내는가? 위급할 때나 매우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소리를 지른다. 마찬가지로 위급할 때나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할 때, 그 때는 합심해서 통성으로 소리를 내서 기도해야 한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합심 통성기도였다.

2) 찬양

24하, ...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하나님의 속성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대주재”라는 말은, 모든 만물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며 간섭하신다는 뜻이다. 그 속에는 “역시 하나님께서 두 사도의 어려움을 외면치 않으시고 간섭하셨구나!” 라는 의미가 들어 있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는 창조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도들의 석방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에 대하여 감복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들은 두 사도의 석방을 통해 살아계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다시 한 번 경험한 것이다. 

3) 기도의 내용

① 구약 예언의 성취, 다윗의 시편을 인용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시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열방이 분노 허사를 경영 - 세상의 군왕(헤롯+빌라도)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 곧 예수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 그러나 그들의 행사는 결국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사도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힘 있게 성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다.

② 복음전파를 위한 기도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위협을 굽어보소서” 이 말의 의미는 핍박자들의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핍박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난이 물러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핍박이 복음전파에 유익이 된다면 어떤 고난도 받겠다는 뜻이다. 초기 교회 성도들의 순교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기도라 할 수 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복음전파의 거룩한 소망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예수 안에서 평안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 앞에 닥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기도였다. 

또한 복음전파를 위해 필요한 능력을 구했다. 병을 낫게 하는 능력,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능력을 달라고 구했다. 그 목적이 순수했다. 병 나으면 복음전파하겠다. 기적이 나타나면 주의 일 하겠다가 아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는 복음전파를 위한 순교적 자세와 거룩한 소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초기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었다.

4)기도의 응답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① 모인 곳이 진동함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표적. 실제로 땅이 흔들렸을 것이다. 합심해서 부르짖는 역동적 기도에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거렸을 것이다. 역시 하나님께서 같은 방법으로 응답하신 것으로 본다. 

②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
여기서 성령 충만의 한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목적에 맞아야 하고, 둘째는 합심 통성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③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진동의 표적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졌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사도가 투옥되는 사건은 이제 시작되는 예루살렘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하셨다. “기도”라는 강력한 무기를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 


2. 은혜가 충만한 교회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1) 한마음과 한 뜻된 교회(32절상)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이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세상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만 말하고 증거하고 자랑한다. 모이면 세상 얘기만 하고, 험담하고 다른 사람 흉보는 얘기만 하고 있다면 성령 충만치 못한 증거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주의 복음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로 충만했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구제하는 교회

성령 충만하면 또 한 가지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구제하는 것이다. 성령충만한 성도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선교, 둘째는 구제이다. 예루살렘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구제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하). 34절에 보면,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구제는 성령충만의 증거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기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집 두 채 있는 사람은 팔아서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빌딩이 두 채 있으면 한 채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3)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 말은 사도들의 설교가 현세적이지 않고 내세적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사도들의 설교가 육신적이지 않고 영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그들은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기 보다는 하늘에 재물을 쌓아 두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의 재물을 팔아서 구제헌금으로 내놨다. 왜냐하면 그들의 소망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해를 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복음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주님에 대하여 듣기를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요, 부활은 천국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설교 예수님이 빠져 버리고 축복과 성공이 주제가 된 설교는 귀에서는 즐겁지만 영혼을 죽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결론적인 고백...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늘 말씀 제목, “담대한 성도가 됩시다!
”담대한 성도는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초기 교회 성도들은 성령충만을 먼저 구하지 않았다. 
일평생 사도행전만 연구한 사도행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모리야 박사, “사도행전에는 성령충만 자체를 위해 기도한 흔적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에는 성령충만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없다란 뜻이다. 다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성령충만해지더라는 것이다. 

남미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에서 따가운 햇살을 받은 얼음덩어리에 조그만 물방울이 하나 맺힌다. 물방울은 골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차츰 다른 물방울들과 어울려 제법 큰 개울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냇물은 힘과 속력이 붙는다. 

시작은 보잘것없지만 수백 미터를 내려가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가며 덩치를 키은 끝에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강, 아마존을 이룬다. 아마존은 1초에 약 2억 리터씩 대서양에 민물을 쏟아 넣는다고 한다. 

우리는 약하다. 걱정 두려움 근심을 안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사랑,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면 그 사랑을 깨닫게 되면 두려움은 떠나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약하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의 메시지는 세 가지이다. 

1.우리 교회의 기도하는 모습은 어떤가? 
2.우리 교회는 복음 전하는 일에 담대한가?
3.우리 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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