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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토요일을 넘어서 부활의 아침으로!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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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을 넘어서 부활의 아침으로! (눅 24:1-12)  

어떤 교회에서 결혼식을 끝낸 신랑이 지갑을 꺼내며 비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비용을 따로 받지 않습니다. 다만 신부가 아름다운 만큼 돈을 내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여기 10만원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 신부를 힐끗 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여기 거스름돈 9만원 받아가세요.” 

오늘 부활절 아침에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사망권세를 깨치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이전에 철두철미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때문에 생긴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생겼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망과 패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도 끝장났습니다.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다 스승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제자들은 깊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각기 어디론가 흩어져 문을 잠그고 스승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절망과 공포로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그야말로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나타났을 때 곧바로 부활을 믿은 제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조리 의심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다니? 그 누구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거짓말에, 유언비어에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소문이 진실처럼 퍼졌다는 가설은 옳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은 우리 못지않게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24장의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무덤에 직접 찾아갔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고 천사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달려가 열 한 명의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제자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이어서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도마 같은 제자는 철저한 실증주의자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자기의 두 눈으로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자기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고 버텼습니다(요 20: 25). 그런데 이렇게 의심 많은 제자들까지도 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더더군다나 부활을 체험한 뒤 제자들이 놀랍게 변화됩니다! 옛날의 그 비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한 목숨 바칠 용기를 가졌습니다. 실제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거의 다 기꺼운 마음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180도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십니다! 더 이상 사망권세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꺾고 승리하신 줄 믿습니다! 초조와 절망과 두려움 속에 빠져 일손을 놓고 있던 제자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실망했고 마음이 무거웠고 뚜렷한 삶의 목적이 없었던 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는지’를 물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해야 한다.” “교회에 잘 나와야 한다.” “착한 일 많이 해야 한다.” 대답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 하나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죽어야 가죠!” 

옳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먼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먼저 십자가에 우리의 옛사람을 못 박을 때 주님과 더불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젠가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오늘 우리와 함께 우신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슬픔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마음 졸이고 시련을 많이 겪은 분들에게 특별히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꺾고 다시 사셨다면 더 이상 우리가 두려워할 원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무엇이 또 두렵겠습니까? 오늘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과 더불어 이와 같은 소망과 담력을 얻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기다릴 줄 모르는 불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성금요일은 그렇게 씁쓸하게 지나갔습니다. 너무도 힘들과 절망스러운 금요일 밤이 지나가고 토요일이 찾아왔는데 우리는 내일 찬란하게 다가올 부활의 아침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거룩한 주일 아침 부활주일을 맞았음에도 여전히 토요일에 무덤덤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삶이 재미가 없고 씁쓸하고 허전할 뿐입니다. 그렇게 토요일에 사시는 분들은 찬란한 부활의 아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의와 좌절의 토요일을 넘어서 희망과 환희의 부활주일로 넘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이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말씀 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미국 미시시피의 한 작은 마을 무덤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선인장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암과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1977년부터 이 선인장이 생겼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파니 루 해머(Fannie Lou Hamer, 1917-1977)라는 여성입니다. 해머의 무덤에는 "나는 진절머리 나는 일에 진저리가 난다"(I'm sick and tired of being sick and tired.)라는 유명한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해머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州)의 가장 가난한 동네의 한 소작농에서 20명의 형제자매들 중에 막내로 태어난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 때부터 흑인노예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해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능은 노래하는 일이었는데, 유난히 흑인영가를 잘 불렀습니다. 1963년 나이 45세가 되었을 때 해머는 자신의 일생을 뒤바꾸어 놓은 연설을 들었습니다.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미국의 시민이 되어서 투표권을 갖게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해머는 유권자 등록을 하려고 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라는 이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투표권을 얻기 위하여 글을 배워야 하겠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문자해독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유권자 등록에 성공했고, 난생 처음 투표권을 갖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머가 소작농으로 있는 백인 주인이 해머가 투표권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무섭게 협박을 해왔습니다. 만일 해머가 투표권을 고집할 경우 해머 부부가 소작하는 땅 전체는 물론이고 농기구마저 다 빼앗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머는 주인의 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투표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댓가로 주인은 해머가 부치는 토지와 농기구 일체를 빼앗아버렸습니다. 밥줄을 끊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렇게 생계가 막막해졌을 때 한 유권자 등록을 위한 시민단체에서 해머의 용기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는 그 단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결국 해머니 이 민권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기가 일수였으며 심한 구타도 수없이 당했습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백인들의 증오와 폭력,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해머는 "백인들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해서 자기 역시 똑같이 백인을 미워할 경우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해머는 독학으로 간신히 문자를 해독한 가난하고 무식한 흑인 여성이었지만 자신의 생애를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일에 바쳤습니다. 잔인한 십자가를 진 성금요일과 토요일이 지나면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밝아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참 너무나 신비하게도 해머가 세상을 떠나 무덤에 묻힌 뒤 한 그루의 선인장이 생겨나더니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선인장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눈부신 꽃을 피우듯이, 사람들은 이 선인장이야말로 불의와 증오의 거친 사막 한가운데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른 한 용기 있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머야말로 무수한 좌절과 실망 속에서도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믿고 기다렸던 믿음의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금요일의 아픔이 있습니까? 토요일의 절망이 있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지나고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밝아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렇게 예수께서 다시 사신 부활주일 아침에 여러분의 빈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채우시고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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