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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행 9: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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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행 9: 36-43)

오늘 부활절 네 번째 주일에 우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행한 여러 가지 이사와 기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여제자를 다시 살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셨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죽은 여제자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하셨던 사역을 눈여겨봐두었다가 스승을 닮아 똑같은 일을 행합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다시 살리는 사역을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의 제자들을 그대로 본받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다시 살린 여인 다비다, 혹은 도르가는 도대체 어떤 여인입니까? 첫째로, 다비다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산 여인이었습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했습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그 당시 유대인이 쓰던 아람어로는 '다비다'요, 헬라어로 '도르가’였습니다. 

그런데 두 이름의 뜻은 모두 '아름다운 노루' 혹은 '영양'(gazelle)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부모님이나 혹은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 여인에게 이와 같이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을 텐데, 다비다는 자기의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그대로 말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향기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7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터키인들(Muslim Turks)이 아르메니아(Armenia)에 쳐들어가 기독교를 믿는 75만 명의 신자들을 학살했습니다. 터키 군인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기독교신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바로 그 뒤에 이들을 묻을 참호 구덩이를 판 뒤 총구를 턱에 겨누었습니다. 그리곤 한 사람씩 질문을 던졌습니다. "Mohammed or Christ"? 모하메드를 믿을 것인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이지요! 

당연히 "Mohammed“를 외치는 사람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Christ, only Christ!"라고 외치면서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고귀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존귀한 이름에 자신의 목숨을 건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크리스천’이라는 존귀한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둘째로, 다비다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뭇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까요? 본문 36절 후반에 보면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했습니다. 다비다는 일생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39절 후반에 보면 다비다는 생전에 바느질을 열심히 해서 욥바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급히 욥바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다비다에게 은혜를 입은 과부들이 울면서 베드로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다비다가 살아 있었을 때에 바느질해서 만든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다비다가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은 다비다의 부지런함과 고귀한 인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랬습니다. 다비다는 욥바에서 바느질 솜씨로 유명한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선행과 구제는 뭇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부흥강사가 한 아미쉬 남성에게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 구주로 모셨는지 물었습니다.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자 아미쉬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저에게 던지세요? 여기 제 주변에 저를 잘 아는 은행원, 식품점 주인, 농장 일꾼들의 이름이 있으니 그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 분들이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기가 대답하기 보다는 남이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내적 신앙이 외적 선행의 열매로 나타날 때, 때로 우리 자신보다 이웃이 우리의 믿음을 더 잘 알 때가 많습니다. 유명한 권투선수 모하메드 알리가 “나는 위대하다!”(I am the greatest!)라고 외칠 때 링 위에 올라가서 상대편 선수를 때려눕히기 전까지는 이 말이 입증될 수 없습니다. “나는 진짜 크리스천입니다!” 라는 주장도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줄 때 비로소 입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친절과 선행을 이웃에게 실천함으로써 이웃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렇게 아름다운 일생을 살았던 다비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7절에 보면 다비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 시신을 다락에 안치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당시 룻다에서 활동하던 베드로에게 두 사람을 보내어서 지체 말고 욥바로 와주십사 하고 간청했습니다. 

룻다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인 텔아비브(Tel Aviv)의 동쪽에 있는 로드(Lod)라고 하는 도시이고, 욥바는 오늘날의 자파(Jaffa)라는 곳으로서 텔아비브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동네사람들이 다비다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베드로를 모셔왔다는 사실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참 아까운 사람 하나 죽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살아났으면 좋을 텐데!" 이런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었을 때 "에이, 그 사람 참 잘 죽었어! 그렇게 못된 짓만 하더니 참 잘 죽었구먼!" 이런 냉소와 경멸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다비다는 너무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너나없이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각종 이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베드로를 청해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다시 살리는 공동체를 향하여>

그런데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리는 장면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먹은 딸을 고쳐주신 내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누가 8: 40-42; 49-56). 

그 때 예수님은 가장 아끼는 수제자 세 사람,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 아이의 부모만 방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40절에 보면 베드로 역시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 역시 다비다의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던 것처럼, 다비다 역시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았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배웠던 일들이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줍니다. 스승이 했던 일을 자세히 보아 두었다가 자신도 그와 똑같이 행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칠 스승, 정말 꼭 따라서 하고 싶은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주변사람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최고의 스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불러 넣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뒤 낙심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 용기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 역시 다시 살리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다시 살리는 스승의 모습을 본받아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는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욥바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대로 다비다는 다시 살아나 평소처럼 부지런한 삶을 살아갑니다. 열심히 바느질하고 구제와 선행을 계속합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예전처럼 아름다운 선행을 계속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42절을 보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남이 지역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베드로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꼭 육체적으로 다시 살리는 일뿐 아니라 낙심했던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세상일에 환멸을 느끼고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런 생각을 접고 다시금 생에 애착을 가진다면 이 역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는 그런 분들이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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