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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 청년의 영 (욜 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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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청년의 영 (욜 2:28-32)
 
‘청년’이란 말에는 설렘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오십일 째 되는 날로, 열 개가 다섯 번 있다는 뜻의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열흘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오늘은 총회가 재정한 청년주일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성령과 청년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령은 청년의 영’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왜 청년의 영일까요? 여기서의 청년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청년’이란, 나이를 뜻하기도 하고,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청년이란 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시간이라는 틀에서 청년을 생각한다면, 사전적인 의미로는 20세에서 40세 미만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청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옛말에도 노년은 검을 현(玄), 겨울 동(冬)을 써서 현동(玄冬)이라고 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것으로 노년을 비유한 것입니다. 반면 청년은 푸를 청(靑)과 봄 춘(春)을 합해서 청춘(靑春)이라고 했습니다. 봄으로 비유했습니다. 
청년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멋집니까? 그 말 속에는 순수함이 들어 있습니다. 설렘과 열정,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도전과 모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청년과 청춘은 아무리 예찬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청년 그 자체가 멋지고, 소중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불안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년이라는 말에는 무거운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홀로 서겠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부모에게 의존해 왔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고, 인생의 지혜와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기초석과 디딤돌로 삼아 독립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의 정신적인 세계에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물질적인 세계에서도 독립하고자 하는 시기가 청년의 시기입니다. 물론 홀로서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원하는 것이 청년의 마음입니다. 

만약 청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의존하고, 부모님만 졸졸 따라간다면 부모님은 걱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얘야, 이제는 너 혼자 서 봐라. 너 혼자 걸어보아라. 네가 청년의 나이가 아니냐. 내가 너를 도와주기는 할 테지만, 이제는 너 스스로 결단하고, 네 손과 발을 움직여서 너의 삶을 만들어 봐라.”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청년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언가 모험을 하기에는 자신이 작아 보입니다. 배우고 배워도 배운 것이 모자라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청년들은 여러 면에서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다른 한 편으로 거대한 장벽에 붙들려 있는 현실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많은 것을 향해 가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고민하고 고뇌하게 되는 것이 청년입니다. 

이런 청년들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바로 이러한 청년의 마음을 가장 잘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함께 근심하고 아파하는 청년의 영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붙여도 성령의 역사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역사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모습들 중에서 오늘은 세 가지 특성만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청년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탄식하고 근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의 영입니다. 걱정하고 아파하며 남의 고통에 참여할 줄 아는 영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여기에서 ‘탄식으로(with groan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속에서 불타는 아픔입니다. 바로 그런 고통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며 신음하고,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도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믿으면 걱정과 근심이 금방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더 이상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더 큰 걱정과 근심이 다가왔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서 그 짐을 내게 맡겨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끊임없이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짐, 또 하나의 걱정과 근심이 주님과 함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걱정을 넘어선 나보다 더 큰 공동체와 이웃을 향한 걱정과 근심이었습니다. 

청년의 영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고, 나만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인생을 달려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청년의 삶이 아니라고 성령은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청년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처녀 때 고고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전혀 다른 인종이 됩니다. 나 자신만을 자랑하던 여인이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 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다 부지런하고 헌신적입니다. 어머니들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서 어머니로서의 꿈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진정한 청년 됨의 모습입니다. 

저는 TV 프로그램인 ‘동물의 세계’를 종종 눈여겨봅니다. 그러다가 동물들에게도 근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먹이에 관한 것으로, ‘얼마나 잘 먹을까? 많이 먹을까?’입니다. 그것이 동물의 본성이자 근심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향해서 헤매고 다닙니다. 둘째는 종족번식에 관한 것으로, ‘어떻게 짝을 만나서 자손을 번성할 것인가?’입니다. 동물들은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만약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과 자손을 많이 낳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동물적인 삶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른 걱정과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위한 근심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근심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가 앞장서서 해결하겠다는 소원을 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은 근심의 대상과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 속에 있는 근심과 탄식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나를 위한 근심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근심으로 바뀌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근심과 이웃을 위한 근심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나를 위한 근심은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근심의 이유를 남의 탓으로 돌려 그 분노를 남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한 근심은 다릅니다. 남을 위한 근심에도 화와 분노가 생기지만, 그 속에서 내 죄와 내 악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을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그것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한 근심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탄식과 근심의 영인 성령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른 사람이었지만, 그의 믿음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모습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예수님을 뒤따랐지만 성령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베드로의 근심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믿고 복 받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 믿고 더 높은 직분을 받게 될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 믿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될까? 그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고민이었고,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는, 성령의 역사에 붙잡힘을 받게 되어 이전과는 다른 근심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까? 어떻게 하나님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내가 근심할 수 있을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까? 어떻게 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을 누리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베드로가 갖게 된 근심과 걱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 근심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줍니다. 

남을 위한 걱정과 근심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꿈과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입니다. 사명이 없는 것은 나에게 근심과 걱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우리 가정이 더 나아가야 되는데...’ 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직장과 교회, 이 민족과 이 사회에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근심하게 될 때,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연약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기도할 제목과 내용을 알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며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과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날 것임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2:28) 

젊은이들만 청춘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꿈을 꾸고 이상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비전너리(visionary)’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누구나 사명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아 마음 속에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청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미와 같은 용모,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손발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혀질 때 
20세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그는 영감이 있어야 청춘이라고 말합니다. 희망과 소망을 가슴에 품으면, 가슴에 사명의식이 담겨지면, 누구라도 청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 29장 18절은 계시가 없는 백성, 꿈이 사라진 백성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나온 이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통해서 하늘의 꿈을 내 것으로 받기 위해서 입니다. 말씀을 받은 자에게 희망이 있고, 사명이 있고, 곧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쳇바퀴 돌아가듯 돌아가게 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참 웃긴다. 젊었을 때는 돈을 벌려고 건강을 낭비한다. 늙어서는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벌어두었던 돈을 다 써버린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돈 이상의, 건강 그 이상의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꿈,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꿈,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꿈.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주신 축복입니다. 

성령은 성숙으로 향하는 배움의 영입니다. 

성령의 세 번째 영은 배움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해서 다가서는 배움의 영을 허락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배우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깁니까?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 무언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참 소중한 것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64살이 되었을 때, 도산 서원을 찾아온 김취려라는 젊은 제자에게 ‘자탄(自歎.나는 탄식한다)’이라는 시를 보여줍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미 지난 세월이 나는 안타깝지만 
그대는 이제부터 하면 되니 뭐가 문제인가?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룰 그날까지 
미적대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게. 

어쩌면 퇴계 이황 선생은 예순이 넘어서 몸이 쇠약해지고, 공부한 것들도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청년아, 너는 아직 세월이 있지 않느냐. 지금부터 열심히 하게. 지금부터 공부하고 준비하게.” 

배움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매일매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여러 가지 축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큰 축복 중 하나를 말한다면 저를 지금까지 배우게 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볼 때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깨닫게 하시고, 후배나 선배를 만날 때 제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나이가 60이라고, 70이고 80이라고,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멈춰서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배워도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하는 새로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을 끊임없이 받기 때문에, 받아도 받아도 넘침이 없이 성숙하고 또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성령을 가르치는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성령을 통해 배우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또한 예수님의 지혜와 생명의 능력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많은 비밀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도록 합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에게는 불안감이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얼마나 씩씩하고 담대할까 하다가도 막상 그들을 만나보면 걱정이 참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스펙을 쌓고, 면허증과 자격증을 여러 개 따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걱정과 불안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며 나가겠다는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저 자격증만 많이 가지면 다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때론 죄 때문에 넘어지고, 허우적거려도 우리 인간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내신 메시지는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아, 너희들이 내 안에 들어오면 너희들이 곧 이 세상의 주인공이란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언제나 ‘청년’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말살시키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각성시키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늘의 계시와 하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어진 삶 안에서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는 청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은 1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한복음 14:12)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질적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양적으로는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능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 말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생각하라)’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When times are good, be happy; but when times are bad, consider.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성령이 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내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의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청년은 나이가 아닙니다. 생각이고,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성령과 함께 사는 삶이 청년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탄식하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영이 있습니까? 내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보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꿈을 꾸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 오늘도 배울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우리는 청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치열하고, 힘들고, 험합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도 마시고,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영과 함께 생각하면서 앞을 향해 나가십시오. 이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하루하루 성령과 함께 청년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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