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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시작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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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시작 (창 2:18-25)
  
지난 4월 중순에 저희 가정의 작은 아버지께서 8순을 맞으셨습니다.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조촐하게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날 잔치에서 가장 많은 인사를 받은 것은 당사자인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저도 잔치에 가면서 그게 가장 궁금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민규인데요... 올해 49살입니다. 자기 말로는 만으로 쳐서 마흔 일곱이라고 하는데... 아무도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들 사촌 형제들 중에서 지난 20-30년 동안 동생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절이나 잔치가 있을 때에도 그 동생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얼마 전부터 그에 대하여 물어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막상 팔순 잔치에 가면서도 우리들은 과연 그가 나타날까? 그래도 자기 아버지 팔순인데... 안 오지는 않겠지... 가보니 정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지요... 예전의 어렸을 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있어서... 혹시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어도 알아볼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가족들은 모두가 그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면서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30년 만에 만난 동생이지만... 마치 며칠 전에 만났던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고 편안하게 서로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침 미국에 사는 제 동생이 한국에 출장을 오면 그가 근무하는 회사로 오게 되어서... 사촌 동생을 자주 만나곤 하는데... 그 동생의 근황을 말하면서... 그렇게 편하게 사는 사람도 없을 거라면서 슬쩍 부러워하였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서 집 근처에 집을 얻어 놓고 혼자서 산다는 것이지요. 식사는 거의 회사에서 해결을 하고... 주말이면 동회에 가입하여서 등산도 다니고... 삶을 얼마나 즐기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모양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에 1인 가구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일인 가구... 다시 말하면 혼자 사는 나홀로 가구가 얼마나 되는 지 아십니까? 450만 가구가 된다고 합니다. 2010년 통계를 보면 23.9%로 24.3%를 차지하는 2인 가구에 이어서 두 번째라고 합니다. 아마 2035년이 되면 762만 가구 정도가 될 거라고 합니다. 
   
혼자서 살게 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겠지요. 제 사촌 동생처럼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독립해서 사는 경우도 있고... 아마 도시에서는 이런 일인 가구가 많다고 합니다. 시골에도 혼자 사는 분들이 참 많은데... 그 경우는 아마도 자녀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배우자와 사별을 하여서 할 수 없이 혼자서 지내는 노인 분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1인 가구가 급격히 늘어나다 보면... 어쩌면 우리들도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사촌 동생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아직은 그를 가장 강하게 받쳐주는 것은 그를 둘러싼 가족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곁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어서 반찬도 해다 주고...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빨리 장가가라고 여전히 잔소리도 해 대고... 교회 좀 나오라고 말도 해주고... 인사나 안부도 주고받는 것... 아마 그런 것들이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삶을 살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일인 가구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오히려 우리들에게 가정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것들은 더 간절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김수영은 ‘나의 가족’이라는 시에서 가정이 가진 묘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이냐...’ 가정에 대한 솔직하면서도 참 섬세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정처럼 제각각인 곳도 없습니다. 밖에서는 아주 근사하고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일단 가정에 들어가면... 아주 평범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들 사이에서 예의나 격식을 갖춘 말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부부나 동기간 사이에서 더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라는 게 속된 말로 콩가루 집안 같은데...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무너지지 않은 조화나 일체감이 있고, 서로를 향하여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은 절묘하게 지켜집니다. 그것을 김수영은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부자연스런 모습이 없이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무질서 한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제각각인듯하면서도 하나인 가정이 가진 신비로움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가정을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어떤 한 두 사람의 계산이나 의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로움이 가정 안에서... 특별히 가족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비로움의 근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127편은 우리가 가정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게 되는 대표적인 말씀인데... 여러분도 아주 익숙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시127:1)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는 것이지요. 잘 되는 가정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정인데... 그런 가정은 심지어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다고 말합니다.(시127:2b) 오늘 우리들 모두의 가정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도 우리들에게 가정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신비한 힘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출발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연애 끝에 가정이 시작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소개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모든 일의 배후에서 작용하신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을 시작하게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처음 이루어진 가정뿐 아니라 우리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가정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마음 가운데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켜보시면서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면서 부터입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v.18) 이렇게 가정은 하나님께서 혼자 있는 사람에게 짝을 만들어 주려고 마음먹으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혼자 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물론 혼자는 외롭습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 디이트리히 본 훼퍼 목사님은 이 혼자 있음에 대하여 독특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어 보이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지닌 한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참 당연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바로 여기서부터 가정이 설 자리를 말하십니다. 혼자 있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아서 한 사람을 보내시는데... 그를 소개하실 때에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18)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그것은 그 사람의 가진 한계와 약점을 돌보아 주고, 그것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감싸주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라디오의 한 음악 프로를 듣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행자가 중년의 남성이라서 그런지...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가 누구냐? 그런 문제를 냈습니다. 정답은 이웃집 남자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참 수줍음을  많이 타서 이웃집에 살아도 인사한번 제대로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부인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런 완벽한 남자가 없는 것입니다. 돈도 많이 벌어오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외식도 잘 시켜주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친정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돈도 잘 벌고 시간도 많은가?’ 남편은 참 열 받게 되는데... 이상한 것은 이사 가는 곳마다 이웃집 남편은 늘 그런 사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은... 내가 너에게 돕는 사람이 되어 주라고... 서로가 만나게 하신 것이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 대하여 생각할 때...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세우시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받는 이상적인 가정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문제 많은 가족들을 내게 주셨나?’ 이런 마음이 들더라도... 

이제는 생각을 좀 바꾸어 보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에게 꼭 맞는 짝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가진 한계와 약점을 채워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가족들이 가진 약점과 한계들... 그런 것들을 향하여 사랑어린 마음으로 다가서려고 할 때에... 내가 그것을 품어주려 하고... 감싸주며 부족한 점을 채워주려 할 때... 진정한 가정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에게 그 짝을 만나게 하시는지... 성경은 이렇게 그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v.21) 이 대목을 풀어서 설명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 대목이 남녀 간의 불평들을 조장하는 빌미로 사용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것 같아도... 결국은 남자의 갈빗대 하나밖에는 안 돼... 만일 이 대목의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아마 그러면 여자들도 가만히 있지를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흙으로 만들었잖아요... 그릇으로 따지면 가장 값싸고 흔한 질그릇 아니예요? 그래도 우리들은 사람의 뼈로 만들었으니까... 본 차이나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역습을 당하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요? 아마... 이것도 바른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가정에서 네가 잘났다... 내가 더 잘났다... 이런 문제로 항상 티걱태걱한다면... 바람 잘날 없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겠지요. 
   
그것은 맞습니다. 창세기에서... 처음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서 만드셨습니다.(창2:7) 이에 비하여 그를 돕기 위해서 만드신 두 번째 사람... 이번에는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시용하신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명백한 사실 중의 하나는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만들어질 때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야 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가정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가진 다른 부분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소중히 여겨지는 것... 이것은 단지 부부 사이의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다면... 그 세상은 과연 사람들이 살만 한 곳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부분들... 그것을 인정해주고 발전시켜갈 만한 기회를 우리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나가면 항상 다른 사람 흉내 내느라고 고달프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이야 말로... 이렇게 저마다 가진 독특함... 그것을 존중해주고... 격려해주고 인정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족들 사이에서 사랑을 말할 때... 그 사랑도 남녀와 세대를 염두에 두며 다른 말로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골로새서3:18-21) 아내에게는 남편에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권하며,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격분시키거나 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 순종이나, 사랑이나, 복종 또는 격려 같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아우르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하지만... 그 사랑도 대상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차이를 잘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정말 다른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진 존재들인데... 때로는 그 차이를 그냥 지나치고 서로를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자녀들을 아주 특별하게 지어 주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것인지... 독특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깨닫지 못할 때도 참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상태도 달라지고 생각도 변하는 것인데... 서로에 대해서 그런 배려를 하지 못할 때도 참 많습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 우리의 자녀들은 누구하고도 같을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이는 것... 여기서부터 가정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처음 사람 아담에게 데려오셨을 때... 아담의 반응은 정말 열광적이고 뜨겁습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v.23) 아담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짝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아마 지켜보던 하나님도 좋기는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어이없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19-20절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고 오면... 그 이름을 짓는 것은 아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도 그것을 아담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가... 마치 그냥 다른 동물들을 끌고 오는 것처럼 그에게로 데리고 오십니다.(v.22b) 그 이전까지 아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이래야 하나보다... 마치 일터에서 직원이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도 없이... 무표정하게 일하듯... 그런 모습니다. 아담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담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정말로 기쁘고 좋았습니다. 마음에서 막 감동이 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말이지요...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우리가 가족들에 대해서 이런 느낌을 가질 때... 바로 거기서부터 가정은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좀 쉽지 않겠지요? 이산  가족이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가족들 서로에 대하여 늘 이런 기쁨과 감동을 잃지 않고 살 수가 있는 것인지... 아마 그것은 서로를 향하여 항상 소중한 마음을 잃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적어도 아담에게 그녀는 그랬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그가 자기의 내면에서부터 어렴풋하게 기다렸던 바로 그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른 모든 동물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과 감정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반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가 노력해야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로를 향하여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일... 이것이 우리의 가정을 가정답게 만들어 가게 됩니다. 
   
아담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v.23b) 그녀를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나서 일을 하셨는데... 마치 아담은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오게 되었는지.. 그 것을 알기나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마치 당신은 나의 분신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고백이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항상 감동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가 가지는 소중함을 늘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부부.. 형제들 사이에서 말이지요. 
   
그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족들은 나에게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또한 이렇게 탄성을 지릅니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v.23c) 물론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처음 사람이 남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과연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을까? 자기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다른 동물들하고 다르다는 것... 그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아마도 자기가 누군지... 자기의 정확한 정체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는 그를 통해서 자기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사람이로구나... 아... 내가 남자로구나... 하는 것을 자기 앞에 서 있는 너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지금 내가 더불어 살고 있는 가족들이 참 고마운 것은 바로 그들을 통해서 나는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나를 알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족들처럼 나에 대하여 솔직하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족들은 항상 나를 사랑을 담아서 바라보아 주고... 나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나에게는 나를 발견하고 다시금 일어 설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참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내가 서로에 대하여 소중한 존재가 되려 할 때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에는 항상 감동과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지요. 
   
가정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서 그런지... 참 담담하고...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서로에게서 아무런 감동도 받을 만한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겠지... 우리는 저마다의 가정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직면하게 될 때에...  생각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들은 누굴까? 그들이 바로 사랑하는 내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한 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나 가까이 있고...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고... 만나면 늘 으르렁 대는 것 같지만... 서로를 생각할 때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사람들... 그들이 부부요 부모요 형제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족의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한 말인데... 그는 한 소설에서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국과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가는 형제들이 마침내 한국과 미국에서 자리 잡고 서게 되는 힘의 비결을 가족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몇 십년동안을 거의 연락도 없이 지내던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을 찾아 왔는데... 근사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쁜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형제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 형은 궁금해 하는 동생에게 이렇게 그 비결을 말합니다. ‘그 동안 한 번도 난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이 없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이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 가족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수로 살아남았겠냐...’(아주 오래된 농담) 
   
우리가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설혹 여러 가지 일로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설혹 몸은 함께 있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생각하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들... 혹시 기족들 중에서 한 사람이 아파하면 그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그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시작이며... 한 몸을 이룬 가정의 진정한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가정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값지고 소중한 선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정은 미완성의 상태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선물은 정말 좋은 것이 되어갈 것입니다. 

 *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려 하는 곳... 
 * 서로가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아름답게 보아주려하는 곳... 
 *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내가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곳...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꿈꾸시고 의도하시는 가정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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