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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의 도우심 (롬 8: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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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우심 (롬 8:22-27)
   
요즘처럼 새로운 단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출현하는 경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서로 다른 말의 머리글자를 조합해서 형성되는 말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요즘 많이 접한 단어는 멘붕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가리키는 멘탈이라는 말과 무너진다는 뜻을 가진 붕괴라는 두 말이 조합된 단어입니다. ‘멘탈이 붕괴되다...’라고나 할까요? 이 말을 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사전을 보니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황을 말하는 신조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생각하지도 못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 일이 많은 오늘의 현실을 잘 반영한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붕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우리들은 지금 극심한 과도기를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껏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던 것들... 인간의 관계며... 자기가 맞이할 내일에 대한 기대와 예상들... 이런 것들이 점점 더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런 것을 빈번하게 겪다보니 이제는 마음마저도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멘붕이라는 말이 결코 좋은 뜻을 가진 말은 아닌 것을 알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이는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붕괴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참 착잡하고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기본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11편입니다. 거기서 시인은 이런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11:4-개역성경) 터가 무너지면... 아마도 시인이 바라보고 진단하는 세상은 그 터가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 되어 있습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요즘 사용하는 ‘멘붕’이라는 말은 그래도 좀 낭만적이고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면... 사실은 그것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시인은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스스로 절망하고 두 손을 들어 버리는 일이란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조치 싫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이런 현실인식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서 8장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부분입니다. 앞부분에는 예수를 통해서 진정한 해방과 구원을 경험한 사도 바울의 내면의 기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으로 가면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도... 심지어는 죽음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기염을 통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v.35)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고서는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수 없습니다.’(v.39) 이렇게 스스로가 대답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사이에 앞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v.22) 좀 의아한 대목입니다. 예수가 나를 해방시키시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 예수를 통해서 경험한 구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느낄 수 있고...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다면... 사실은 항상 기쁘고... 항상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는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음하는 현실에 직면해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v.23)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주님을 통하여서 누리게 된 구원과 해방의 기쁨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정말 이렇게 세상을 살면서 신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은 있기는 한 것인가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건강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또는 교회의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시편 11편에서 보았던.. 그런 고민을 하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터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같은 무력감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데... 나는 비록 의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아픔과 괴로움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절망하며 흔들리는데... 같이 흔들리면 흔들렸지... 그들을 견고하게 붙잡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인 것이지요. 

모든 피조물들이 이제까지 신음하고 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 사도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이 담겨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오늘 살았더라면... 혹시 그분도 ‘멘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으셨을지... 비록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는 하였어도... 아직 그 나라는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운을 막으려 하는 세력도 참 많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며 보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야기에는 우리가 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이지만... 그것은 신앙의 여정의 출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v.23b) 여기에 바로 우리의 미래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기는 하였지만... 아직 그 것은 온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하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서 우리가 그것을 온 몸으로 느끼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신음하면서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온전한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주 진실하면서도 진지하게 자신과 세상을 성찰하면서 살고 있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살기는 하여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과 자기의 온전한 구원을 갈망하며 신음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소망은 세상이 가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v.24)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세상이 흔들리고 있고, 자기들이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신음한다고 하여도...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세상이 가지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가지는 소망을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그런 소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라든지... 안정된 직장이나 좋은 집이며 많은 소득들... 그리고 건강한 노후의 삶이라든지...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상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에는 아무런 힘이 되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이제 소망이라고 하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란 어쩌면 그것은 소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막연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면... 그것은 참 좋은 것이고 온전한 것이다... 어쩌면 참 어리석어 보이고 맹목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기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면서... 가잔 심각한 현상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좋은 것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소망이라는 것을 말하기가 정말 공허하고 힘들어 졌습니다. 그것은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든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 다가옵니다. 그럴 때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세우는 것을 전제로 한 거야... 만일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무너져 내릴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면... 그것은 더 완전하고 정말 좋은 것이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셔...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소망을 말하는 사람의 소망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지금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우리들도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 신음합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속으로 신음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평소에는 별로 매력이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소망들이 점점 더 사라져 갈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이야말로 진정한 소망으로 자리 잡습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설해 나가는 세상이 있다는 소망... 그것을 항상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국에는 바로 이 소망이 우리가 어려운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합니다.’(v.25) 바울은 이렇게 소망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소망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남과 그분이 만드시는 세상에 대한 소망일 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든든히 서게 하는 힘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은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더 아프게 신음하면서 세상을 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새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여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막연하고 지루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v.26) 

앞에서도 바울은 성령님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은 받은 우리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철저하게 성령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느끼든지 그렇지 않든지...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때로부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성령님은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도록... 나사렛 예수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이미 우리의 내면 가운데서 작용하고 게시며,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마 오늘도 우리들에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아주 인상 깊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v.26) 물론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이지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라는 말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신다는 것...’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교롭게도 앞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는 세상을 말하였습니다.(v.22)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v.23) 이런 피조물의 신음과 성령님의 탄식... 무엇인가 연결되는 느낌이라는 것이지요. 아마 세상의 피조물들이 신음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속으로부터 신음하지 않았다면... 성령님께서도 탄식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탄식하신다는 것... 그것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가슴으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시고 계신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신음하는 세상에서도 언제나 하늘을 소망하며 바라보고 살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우리를 향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도우시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서 ‘보혜사’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하고 있는데(요한복음 14:16), 거기에는 ‘나의 곁에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은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경 스가랴서를 보면 이렇게 성령님을 언급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윗의 집안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주겠다.’(스가랴서 12:10)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게 하시고 ‘용서’를 비는 영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이 들 때에... 어떤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고...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자기 힘으로 수습하려 하고... 이러다보면 우리들의 삶은 더 힘들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위축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이런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 은혜를 구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가지게 하십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고 용서를 빌 때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또한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자신은 세상을 떠나가지만, 새로운 보혜사 곧 성령님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일깨워주고 생각나게 하신 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26)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생각나도록 기억을 일깨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울이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에 대한 기억과 회상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주님 안에서 살게 하여 줍니다. 비록 육신의 예수는 우리 곁에 게시지 않아도,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이러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28:20) 그런가하면 이 땅에서 감리교회의 운동을 시작하신 영국의 죤 웨슬리 목사님은 삶을 마치시면서 이런 소중한 고백을 남기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기억하게 되고.. 마침내 주님과 동행하는 신비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도우심을 항상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v.26)

바울은 어떻게 우리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지요. 좀 가슴이 뜨끔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떻게 기도할 줄도 잘 모르겠고... 무엇을 구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나님께 엎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면서라도 기도하려 하는 것... 그래도 하나님을 향하여 엎드리려고 하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여 주시는 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항상 내 곁에서 나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는 것... 그분은 나를 위하여 내게 필요한 것을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하시는 분이라는 것... 이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우리에게 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생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하늘 바라보면서 은혜와 용서를 구하게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주님 되신 예수와 동행하는 신비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대마다 나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여 주십니다. 이런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걸어가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기쁘고 발걸음이 힘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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