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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을 바라는 자의 삶 (빌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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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바라는 자의 삶 (빌 3:10-14)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1~53 말씀에“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존귀한 것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고린도후서 12:4에서 밝히기를“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고자 스스로 다짐하기를“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난과 희생을 당한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터인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10절~11절에“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떠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자아를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안일을 생각하셨더라면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군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제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2~53)하시면서 아무 힘없는 사람처럼 붙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신 후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죽음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버리신 희생의 삶을 본받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고 했습니다. 내 속에 나를 죽인 것만큼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내안에 있는 자아 즉 나의 속사람의 정체를 아십니까? 완전히 타락한 존재입니다. 사탄에게 뿌리를 둔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아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죄악을 즐기는 못된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이 나를 해칩니다. 나를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나로 하여금 불행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나를 위한다는 그것이 나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끌고 갑니다. 

이 타락한 자아의 정체에 대해 디모데후서 3:1~5에 밝히시기를“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타락상이 말세의 징조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다는 것의 결국은 무엇입니까?“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결과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가정불화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가끔씩 볼 수 있는 성도간의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자기가 우선입니다. 자기가 중입니다. 자기를 위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다 옳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잘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지 자기중신적인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헬라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Procoustes)의 침대"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사람은 장대하면서 아주 교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테네로 향하는 어느 길목에 자기의 철 침대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뉘어 봐서 자기 침대보다 사람의 몸이 크면 잘라내고 침대보다 사람이 작으면 죽도록 두들겨서 늘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 철 침대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커도 죽고 작아도 죽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교훈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어리석음과 폐단을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들의 잣대를 자기고 남을 재면서 남아도 문제를 삼고 모자라도 문제를 삼습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어져야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불법과 부정으로 매도합니다. 이것이 단합을 헤치고, 평화를 헤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 주변에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사람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二.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본문 12절~13절에“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시점은 바울사도가 원숙할 대로 원숙해진, 마치 잘 익은 과일이나, 수확을 앞둔 곡식과도 같은 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 후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후였습니다. 성경을 13권을 썼습니다. 이처럼 그는 부활에 참여할 하등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마치 구원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하듯, 아무 상도 받을 수 없어 하나님의 책망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 온전해지기 위한 바울 사도의 겸손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0:12에 말하기를“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를 실천하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비결중 하나가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면“낮은 포복”훈련을 받습니다. 뻣뻣하게 서 있으면 적의 총알받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는 것은 필수요건입니다.

바울사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린도전서 15:9)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 3:8)라고 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나(내게도)”(고린도전서 15:8) 라고 했습니다. 
순교하기 직전에 그는 말하기를“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했던 바울사도를 더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6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라십니까?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기대하십니까?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낮아진 사람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언제나 물처럼 낮은 곳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기름을 잔뜩 빨아들여 제법 밝아진 호롱불이 자신의 불빛을 뽐내며 주인이 바느질 하는 곳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호롱불이 주인에게 말했습니다.“주인님! 이만하면 저 높은 하늘에 뜨는 달보다 제가 더 밝죠? 세상에 저와 같이 아름답고 화려한 불빛이 또 있을까요? 아마 없을 거예요. 주인님도 제가 없으면 밤에 바느질을 못하니까 저를 제일로 여기고 계시리라는 것쯤은 저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바람이 “획”하고 지나가면서 호롱불을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위는 어두워졌습니다. 바느질하던 주인은 일감을 잠시 놓고 꺼진 호롱불 심지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호롱불에게“고것 봐라, 네가 뭐 그리 잘났다고 까부느냐? 겸손할 줄 좀 알아야지. 이까짓 바람에도 꺼져버리면서....”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토기장이가 한줌 흙으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 듯, 우리를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호롱불 같은 존재가 우리들 인생입니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꺼질 수밖에 없는 호롱불 인생임을 기억하며 언제나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장차 있을 부활을 기대하는 성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1~2에 말씀하시기를“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三. 하늘의 상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금메달을 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는 육상선수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생명을 걸고 힘쓰고 애쓴 삶의 목적은 부활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나라 상급이었습니다.

헬라의 한 도시 고린도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나태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노력은 없이 안일한 생활을 하면서 복을 받길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기 위해 그 시대에 흔했던 운동 경기자들의 모습을 예로 들어 교훈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4~25에 기록하기를“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당시 운동 경기에 이긴 사람에게 월계수나 감람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씌워줬습니다. 나뭇잎으로 된 이 면류관은 곧 시들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이를 가리켜 썩을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운동선수들은 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운동 경기자들은 통상 10개월가량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음식과 오락, 수면 등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의 경우 어떤 경기는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몇 분 동안에 승패가 결정됩니다. 이 몇 분밖에 안 되는 경기를 위해 몇 년 동안 자기와 싸우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합니다. 그 결과 영광이 있습니다. 이 날이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았겠습니까? 젊음의 온갖 욕망을 참고 또 참았을 것입니다. 영광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절제 뒤에 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의 노력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도 81kg급 김재범 선수가 있습니다. 김재범 선수가 금메달을 딴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지금 몸의 왼쪽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왼쪽 어깨는 물론 팔꿈치와 손가락, 무릎까지 아팠습니다. 어제까지 제대로 뛰지도 못할 정도여서 진통제를 맞아가며 훈련을 했습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연골판이 찢어진 왼쪽 무릎은 통증이 너무 심해 연골주사를 거의 매일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왼 팔꿈치는 심각한 관절염 증세를 보이고, 양쪽 10개 손가락은 힘줄이 늘어나 완전히 펴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고질적인 허리통증을 참아가며 경기를 했습니다. 주치의는 말하기를“제대로 검사를 한다면 어깨와 팔꿈치만으로도 최저 장애 등급인 6등급은 나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그의 몸은 당장 수술이 필요한 중환자였습니다. 바로 그 장애의 몸으로 김재범 선수는 금메달을 땄습니다. 

김재범 선수는 신앙생활도 금메달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초인적인 힘에 대해 그는 깊은 신앙이라고 밝혔습니다.“나는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나 깨나 기도하고 있습니다. 왼쪽어깨, 팔꿈치, 손가락, 무릎, 허리 등 정말 부상이 많은 몸인데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도 꼬박꼬박 참석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신앙과 불굴의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시들지 아니하는 부활의 면류관, 영원한 하늘나라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에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인 기도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살리는 전도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섬기는 봉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의 부활을 위한 삶은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려는 육신의 욕망을 이겨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에게 임하시게 됩니다. 구약성경 대하 16:9 말씀에“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2 말씀에“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격렬하게 빼앗다.”라는 것입니다. 격렬하게 경기하는 운동선수를 연상케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며,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에게 부활의 영광된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승리와 행복을 바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0:12-13의 말씀에“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며 순종하는 것은 장차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승리와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하겠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완전함에 이를 수 없는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늘의 상급인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운동선수들처럼 노력하고, 인내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를 이러한 복된 삶으로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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