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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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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1-10)


유대교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하루 종일과 밤중까지 계속됩니다. 일요일 이른 새벽에 안식일이 끝납니다. 그 시간 동안은 바깥에 다니는 것조차 못하고 예배도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예배 처소에 가서 예배드리고 와야 합니다. 예배드리러 가는 것도 2km 이상 가면 안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는 새벽”이라고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고 운명하신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정성껏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그러자마자 곧 해가 넘어가서 안식일이 시작이 되니까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에 올 수가 없어서 조용히 지났습니다. 안식일 날 예루살렘을 한번 가보십시오. 저는 갔다 왔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에 5분이 지나면 거리에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못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다가 외국에서 온 관광버스만 그냥 지나가도록 되어있지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유대교의 안식법입니다. 안식일 해제 시간이 오자마자 이른 새벽에 기다렸다는 듯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왜 이 여인들은 무덤을 보려고 왔는가? 이유가 누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장 54~56절에 보면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와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유대 나라의 장례 문화의 차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무덤에 가는 사람들이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갈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성경구절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도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밤잠도 자지 않고 안식일 해제만 기다렸다가 새벽같이 향유병을 들고 무덤에 온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장례식 때 하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땅 속에 시신을 묻어버립니다. 그리고 땅 속에 묻은 시체는 영원히 보지 못합니다. 어쩌다가 묘지를 옮길 때 이장하느라고 땅을 파서 뼈다귀를 모셔가는 일만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 나라는 죽은 시체를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는 납골당 문화 장례입니다. 베다니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 치른 지가 나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시체가 부패해서 썩어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리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 수건을 동인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한국 같은 무덤 문화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납골당 장례 문화는 관 뚜껑만 열면 언제나 시체를 볼 수 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서 부활했다고 거짓말한다는 소문을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62~66절에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 늘 생각합니다. 로마 군인의 경비병 제도는 4명씩 4개조로 6시간씩 교대 근무합니다. 안식법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지도 못하는데다가 그 무시무시한 로마 경비병들이 무덤 앞에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데 누가 감히 거기를 갈 것입니까? 로마의 경비병들이 굳게 지켜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더욱 확실해진 결과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4절에 보면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같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여러분 경험 가운데 죽은 시체와 함께 혼자서 밤을 함께 1대1로 지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것도 어머니, 아버지 같은 가족관계가 아니고 절대 남남 관계의 시체를 좁은 방 안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둘이 밤새도록 있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20대 중반에 불쌍하게 혼자 사는 독거노인 할아버지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나오셨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제가 혼자 시체 처리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방에 촛불 하나를 켜놓고 시체와 둘이서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어떨 거 같습니까? 으스스합니다. 아무리 찬송을 불러도 으스스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밤중에 이 할아버지가 슬며시 일어나서 “어이구! 전도사 오셨구먼!”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나도 죽은 사람과 같이 됩니다. 

지금은 한국도 장례문화가 선진국이 되어서 가족도 목회자들도 시체 처리를 안 합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전도사들이 다 했습니다. 저는 수도 없이 장례 났다하면 다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약국에 가서 알코올 사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코올로 몸 전부 닦아 드리고 옷 입히고 관에 집어넣고 관 끈 메고 십자가 관포 덮어놓고 거기에 성경책 넣고 장례 기다리고 있으면 나중에 목사님 오셔서 발인예배 드립니다. 이런 일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여전도사, 남전도사 할 것 없이 전도사들이 다 했습니다. 가족들도 무서워서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 향품을 발라드리는 장례 문화 때문에 지금 지나간 다음에도 와서 합니다. 마가복음 기록을 보면 16장 1~4절에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발라드리는 문화입니다. 장례식 후에도 발라줍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저는 이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 누워봤습니다. 

입구를 돌로 막으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큰 돌을 막고 인봉했습니다. 빌라도 감독의 인봉입니다. 누가 뗄 겁니까? 큰일 납니다. 오늘 10절까지 읽었는데 11~12절에 보면 이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양심선언을 합니다.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되어진 모든 일들을 그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우리는 현장 책임자들이오. 나사렛 예수를 당신들이 죽이라고 해서 죽였는데 살아났단 말이오.”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대제사장들이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거짓말해라. 우리가 잠든 사이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해갔다 해라.” 그랬더니 군인들이 “돈은 가져가겠소. 그러나 살아났단 말이오.” 지키라고 보낸 군인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완벽한 증거가 이루어진 겁니다. “나사렛 예수가 살아났단 말이오. 

우리는 현장에 있던 목격자요.”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 설교를 제일 먼저 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예수가 살아났단 말이오.” 그리고 향품 봉사를 하러 왔던 마리아들이 “예수가 살아났어요.” 알립니다. 여러분! 세상에 거짓말 꾸며보십시오. 완벽한 문서를 만들어도 금방 탄로가 납니다. 진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난 이 부활 사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은 세상에서 죽었다는 것은 일이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죽으셨습니다. 좀 일찍 가도 일이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부활절 새벽예배 새문안교회에서 드렸는데 설교를 누가 했는지 아십니까? 방지일 목사님이 102살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설교하셨습니다. 그 어른은 나 졸업 설교를 해주신 분인데 아직도 그렇게 살아계셔서 지금도 설교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보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많습니다. 나사로도 살아났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장례식 하다가 다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다 살려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사건을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좀 더 살다가 또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한번 부활한 다음에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 첫 열매를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부활한다는 것을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정의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는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보십시오. 복음서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미리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을 거야! 그렇지만 3일 후에 살아나.”, 마가복음 8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장 31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누가복음 24장 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이 3일 만에 살아난다는 예수님의 예언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까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빌라도가 3일 동안 지키라고 한 거 아닙니까? 그 예언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예언을 보십시오. 아주 기간이 짧은 예언이 있습니다. “베드로야! 오늘 밤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거야.” “내가 죽으면 죽었지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했지 않습니까? 그게 예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는 몇 시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했을 거 같은데도 예언대로 되어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리라.” “왜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겠습니까?” 하지만 다 도망갔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네가 나를 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팔다니요?” 예언대로 다 되었지 않습니까? 그것은 불과 몇 시간 후 그리고 하루, 이틀 사이에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의 웅대한 건축물을 자랑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 건물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46년 들여서 지은 이 성전이 왜 무너집니까?” “두고 봐라.” AD 70년에 로마 군인에 의해서 다 무너지고 한쪽 벽만 남아서 통곡의 벽이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재건이 안 되었지 않습니까? “내 말은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예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재림입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 믿거나 말거나 다시 오리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 “그가 말씀하셨다.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예수님 부활의 첫째 교훈이 그것입니다. 그가 예언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무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었는가? 인류 역사의 초유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도 다른 마리아도 예수의 무덤을 왜 왔습니까? 시체 처리입니다. 뚜껑을 열고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서 향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리라고 생각하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살아나셨지 않습니까? 나중에 마가복음 16장 11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안 믿었습니다.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내가 살아나신 예수를 봤다니까!” “거짓말 하지 마라.” 안 믿었습니다. 누가 믿는가? 믿게 해주신 자만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이 시간이 3년 후나 30년 후라고 예언을 하셨다면 모르겠는데 3일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잘랐습니다. “3일 후에”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일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금식하면서 기다렸어야 합니다. 아무도 안했습니다. 왜 안했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세 번이나 봤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가지고 오천 명 먹이는데 자기들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초능력의 모든 사건을 기초로 해서 3일 만에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그렇게 여러 번 예언하셨는데도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믿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두 번째 특징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 부활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확인된 사건입니다. 기독교 역사,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약 300년 동안 핍박 받았습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 밀라노 칙령 때 비로소 박해가 사라지고 기독교가 숨을 쉬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걸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지 않습니까?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 모조리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었잖아요?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아시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했지 않습니까? 왜 흩어졌습니까? 죽이니까 살기 위해서 흩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믿었습니까?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의 증거 때문에 예수가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나중에 예수 증언자가 된 후에 예수에 대한 증언을 할 때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다시 살아나신 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이 목격자들의 증언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목격한 사람은 반드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증언이 퍼져나가는데 아주 불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도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안 됩니다.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힘이 있어서 어떤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진리의 빛으로 온 세상을 점령해 나갑니다. 

경비병들이 대제사장들에게 왔지 않습니까? “여보시오! 우리는 예수 무덤지킴이 현장 책임자요. 총독 명령 임무 수행자요. 그런데 예수는 살아났단 말이오. 우리가 봤단 말이오. 어떡할 겁니까?” 그때 대제사장들은 “그러면 그는 메시야다.” 이래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돈 보따리만 챙겨서 “이거 줄 테니까 가지고 가서 아무 소리 말고 도둑질해갔다고 거짓말해라. 

알았지?” 요한복음 20장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고, 마태복음 28장 오늘 말씀에 여러 여자들이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고, 누가복음 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마가복음 16장 열한 제자가 한 곳에 모였을 때 나타나셨고, 누가복음 24장 제자들 앞에서 육체 부활의 증거로 구운 생선을 잡수시고, 요한복음 21장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와 1대 1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화하시고, 고린도전서 15장 1절 500여명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도할 때 “그때 본 사람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어떡하느냐?”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급속하게 퍼져나갑니다. 

류 월러스(Lew Wallace)와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 내가 이 말을 하면 아는 사람들은 ‘아! 저 목사님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알겠다.’ 금방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허구성을 만들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괜히 쓸데없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거짓말 하는 거야! 이것을 반박할 수 있는 책을 내가 이 세상에 써서 내보내야 돼!’ 시작했습니다. 그 책의 목적은 예수 부활의 허구성을 밝혀내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내가 이것을 밝혀서 문서로 만들어서 돌려야지.’ 반박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거짓말 한다는 책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다가 성령이 충만해져 버렸습니다. 그가 마음이 변해서 자기가 쓰던 글을 반대로 뒤집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글을 쓴 것이 그 유명한 “벤허”라는 작품입니다. 필라델피아에 가시면 “불멸의 네 군목”이라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미국의 군함 한척이 침몰되었습니다. 모든 수병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살기 위해서 뛰어들었는데 구명조끼가 모자란 겁니다. 

그런데 그 함대에서 장군들의 신앙을 위해서 일하던 네 명의 군목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부지런히 벗어서 다른 수병들에게 전부 입혀주면서 “빨리 탈출하라! 우리들은 죽지 않는다. 우리들은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믿으라.” 그러면서 네 명이 손을 잡고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면서 그 군함과 함께 네 명이 죽었습니다. 그의 도움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그 이야기를 해서 “불멸의 네 군목, 절대로 죽지 않는 네 목사” 그래서 그 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부활은 한번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바울 선생은 철학의 도시 고린도에 가서 전도할 때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쟁이로 탄로가 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마르다를 향해서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진리를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 것을 내가 이 자리에서 네게 보여주겠다. 네 오라비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다는데 가자! 나사로야, 나오라.” 살아났습니다. “이는 또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해서 영원히 산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네가 믿느냐?” 이 질문에 여러분도 그대로 믿으신다면 우리 큰소리로 한번 “아멘”하십시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질문에 “아멘”으로 고백하면서 부활의 승리를 가지고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불멸의 영원한 아버지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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