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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려가 필요합니다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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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가 필요합니다 (히 10:19-25)

옛날 스파르타 사람들은 전쟁에서 패한 장군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했습니다. 많은 스파르타의 장군들은 조국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장군들이 죽다보니 스파르타에는 더 이상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일당백의 기개를 자랑하던 스파르타 사람들이었지만 그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로마는 달랐습니다.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패배라는 수치심으로 받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여 더 이상의 고통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면 명예 회복의 기회로 삼기 위해 더 힘을 낼 것이고, 패배의 경험이 전투에서 오히려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가장 오랜 역사를 기록한 대 제국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과도한 경쟁과 사회 전반에 흐르는 성공 제일주의로 인해 실패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이상 꿈을 꾸지도 않고, 스스로를 좌절 속에 가두고, 실패에 대한 자책감으로 삶을 포기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합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 긍정의 말 한마디가 절실히 필요한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격려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로의 힘은 인격을 세웁니다. 미움을 녹이고 사랑과 용서를 만들어 내는 힘이 한 마디의 격려와 단 한 마디의 위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 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 최상의 의무 중의 하나는 격려의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열에 찬물을 끼얹기는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절망시키기는 훨씬 쉽습니다. 이 세계는 다른 사람을 좌절시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격려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서로 격려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남을 흉보거나, 욕하는 말보다는 위로의 말이 오고가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셔서 주로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역예배에 모여서 나누는 대화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보통 대화에는 다섯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차원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대화입니다. 아는 체 하는 정도의 대화를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세요?”, “식사 하셨어요?” 하는 정도의 그야말로 형식적이며 의례적인 대화입니다. 

그 다음 차원이 객관적인 정보나 사실, 지식 등을 교환하는 대화입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대화 형태입니다. “이번 주 구역예배는 어디서 드리죠?”, “예배시작이 몇 시예요?”, “예배 후에 월례회가 있는데 참석 하실 거죠?” 등입니다. 이렇게 2차원적 대화는 사무적인 일 중심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 차원은 대화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이나 견해를 주고받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이것은 둘의 관계에 어느 정도 신뢰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나누어지는 대화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 같네요.” 하는 식입니다. 자신의 분명한 견해와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 차원의 대화는 사사로운 감정까지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럴 때 솔직히 말해 화가 나요.” 라든가 “그때 그 일 때문에 당신에게 무척 실망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존경하는지 모르죠?”, “당신이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지는지 몰라요.” 이처럼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해 주거나 이해해주고 공감해 주는 정도의 대화야말로 수준 높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차원의 대화가 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는 대화입니다. 이제는 따뜻한 눈길만으로도 마음이 읽어지고, 미소와 얼굴 표정으로도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관계의 대화입니다. 아마도 인격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얻어야할 가장 수준 높은 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 없는 대화, 모순인 듯 하면서도 가장 높은 차원의 비밀이 숨어 있는 대화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훈련해야할 신앙적 차원에서의 대화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격려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덕목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데서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 속에는 격려도 있어야 하고 위로도 있어야 합니다.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는 성도의 격려와 위로는 보배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인격에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고 자녀의 미래를 좌우하기도합니다. 말 한마디가 배우자를 초라하게 만들어 의욕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한마디의 말로 성도들 간에도 샘솟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이 정도의 격려와 위로와 칭찬이 있는 교제가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격려의 의미와 내용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격려” 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의미로는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아 주는 것” 을 격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격려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초조하게 하다.”, “논쟁을 격발시키다.” 라는 다소 공격적인 의미입니다. 왜 이런 단어를 사용했느냐 하면 격려의 동기를 유발 시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로 돌아보아” 라는 말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격려란 어쩌다 한번 생각나서 대충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서로를 자극하여 격동시키듯이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격려하려면 우선 같이 있어야합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 억울함을 당한 사람, 마음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격려의 시작입니다. 거창한 말을 해야 격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서 마음을 같이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한 사람에게 가서 공연히 그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괜히 병원에 입원한 사람에게 가서 한다는 말이 “네가 그러니까 아픈 거야!” 라든가 이별한 사람에게 “네 하는 꼴을 보니까 도망가게도 생겼네.” 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위로하러갔다가 오히려 더 상처를 주고 오는 욥의 친구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론 그냥 두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격려는 서로를 자극할 줄 아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자극, 서로가 서로의 성숙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격려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격려해 줄 것입니까? 격려의 내용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중요한 격려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믿음에 대한 격려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무슨 일을 만난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격려에는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갖도록 서로 격려하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빠진 격려는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안정시킬 수는 있으나 결코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가령 성도 중에 인간관계로 빚어진 시험에 들었다고 합시다. 가서 위로한답시고 상대방의 사람을 험담하는 믿음이 없는 방법으로 일시적인 처방을 했다고 합시다. 그때는 좋았지요. 하지만 그가 시험에서 회복 되었을 때는 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은 나를 행한 험담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고 생각되는 순간 나와의 인간관계도 끝입니다. 

둘째는 소망에 대한 격려입니다. 본문23절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하나님의 언약을 봅니다. 하지만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그 소망이 자꾸 흔들립니다. 누구나가 그렇습니다. 그럴 때 그 소망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소망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격려입니다. “하나님이 꼭 좋은 것으로 주실 거야!” 해야지 “어떡해! 하나님이 널 버리셨나 보다.” 해서 되겠습니까? 어려워서 사방을 돌아 볼 겨를 없는 사람에게 소망을 볼 수 있게, 그 소망을 굳게 잡게 격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에 대한 격려입니다. 본문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그런데 왜 사랑에 선행이 따라옵니까? 선행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동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사랑이란 나를 희생하여 그를 즐겁게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내 격려와 나의 위로가 그에게 더 없는 힘과 용기를 주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이 사랑의 격려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격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격려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입술의 달콤한 말은 이성의 일시적인 마비를 가져올 뿐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으로 번민하는 자에게 인간적인 방법은 잠깐의 육체적인 유익은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위로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시험이 와서 흔들리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는 신앙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누군가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한 마디가 한 영혼을 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격려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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