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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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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마 5:6)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 구약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교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119: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143: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이란 지독한 가뭄으로 심각한 기갈에 헐떡거리는 사슴처럼 그 영혼이 하나님을 울부짖으며 찾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모하여 쇠약함’과 ‘사모하기에 피곤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영과 혼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되어 기진할 지경까지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몸과 영혼이 기진맥진하여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을 때, 하나님의 축복, 평안하리라,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리고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이방 사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께 소리질러 간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7절). 

그러나 예수는 들은 채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귀찮을 정도로 따라오며 제발 도와 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시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냉정하게 그 간절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아마 동족이 아니라 안 된다는 말에 암담했을 것입니다. 병 좀 고쳐 주는데 무슨 인종을 차별하느냐 따지며 대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귀신들린 딸이 너무나 불쌍할 뿐만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 발 앞에 바짝 엎드려 다시금 간청했습니다.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라며 비명에 가까운 절규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께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어떻게 개한테 던져 준단 말이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26절). 

한 마디로 개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 좀 고쳐보겠다고 그토록 간청했지만 참으로 참기 어려운 너무나 치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참담해졌을 것입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만 아니었다면, 네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냐? 살다 보니 재수 옴 붙었다며 침을 탁 밷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같은 예수의 말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체면도 불사한 채 기막힌 말로 간청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실로 그녀는 “주여, 당신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제가 개가 된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제 딸만 고쳐주신다면 한이 없습니다. 제 딸을 살려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며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에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흉악히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예수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같은 취급을 받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따를 만한 가치가,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보화가 그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그 큰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에 대한 간절한 마음, 어떻게 해서든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쳐보리라는 간절함, 자신은 어떠한 취급을 당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그 큰 믿음으로 나타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깨끗하게 치유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의’(義)란 무엇이겠습니까? ‘의’(義)란 먼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생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 바른 삶의 길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B.C.1030년경,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당장 가서 아말렉을 공격하여 젖 먹는 아이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진멸해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15:2-3) 

하나님께서 이같이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오랜 노예 생활로 전투 능력이 전무하고 광야 행군으로 피곤하고 지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했던 족속이 바로 아말렉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행군 대열 중 뒤에 쳐진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을 공격했던 아말렉의 교활함과 비겁함에 대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응징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25:17-19)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그 후 약 5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가나안 땅에서 안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5:2)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여기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라는 말씀에서 “추억하노니” 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500년 전의 아말렉의 교활하고 비겁한 공경행위를 기억하시고 그 때 말씀하신대로 아말렉을 도말하라는 것입니다. ‘도말’하라는 것은 아말렉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조금도 아껴보지 말고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을 철저히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을 진멸했습니다.”(삼상15:8,9)   

아말렉의 악행을 “책에 기록하여” 결코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500년 동안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어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즉각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고 비겁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거만하며 신성 모독하는 죄악이며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라며 사울 왕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명암이 엇갈리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후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왕권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버림받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목이 베인 그 시체가 블레셋 전역에 보내어져 멸시를 당하고 성벽에 못박히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습니다.(삼하31:1-13) 

다윗은 이처럼 사울 왕이 하나님 말씀을 버려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건을 목격한 터라 하나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19:7-11을 보겠습니다.

(시19:7-1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마지막 11절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는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지킨 자, 곧 의를 행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는' 성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한다는 다윗의 고백이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의’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십 수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실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창15:2-3)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15:4-5)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나이가 많을지라도 반드시 아들이 낳게 하여 번성케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를 얻었는데 왜 나중에 할례를 받게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믿음으로 된 의를 확인하기’ 위해 나중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지 않아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대역으로 된 로마서4:11을 보겠습니다.

(롬4: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동안에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9을 보겠습니다.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 안에서 의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5:21입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따라서 예수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16-17입니다. 

(롬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요 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분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십자가에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리고 목마른 자”의 뜨겁고 강렬한 심정으로 의(義)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자가 의인이며 복있는 자입니다. 


3. 오늘 본문의 “굶주림”(hunger)은 당장 먹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굶주림을 말하고, “목마름”(thirst)은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갈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자가 먹을 것을 찾는 것만큼, 목말라 죽어가는 자가 마실 물을 구하는 것만큼 강렬하고 절실하게 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셨다.’고 했습니다.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셨다’thirst)는 것은 ‘당장 먹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로 굶주리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실 때 손과 발에 못박히시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시어 그야말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후 “내가 목마르다.”(요19:28. thirst)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갈증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셨습니다. 

물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것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리고 목마름’은 단지 육체적인 욕구에만 그치지 않고 정신적, 영적인 ‘주리고 목마름’까지를 포함한 의미를 말합니다. 사람마다 지식에 대한 갈망, 물질, 돈, 지위, 권력 등에 대한 갈망,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 명예, 명성 등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주리고 목마름’을 단번에 해결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기적과 능력을 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6:26-27입니다.

(요6:26-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이 다시 예수께 물었습니다. ‘(요6:28)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요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보여 줄 만한 기적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그들을 먹였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며 다시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요6:32-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주님, 그런 양식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 고 하자 예수께서 “(요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3-5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셔서 그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게 되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게 되므로 영육간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계7:16-17)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모든 ‘주리고 목마름’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해결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목마른’ 한 여인의 갈증을 깨끗이 해결해주신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번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데 유대인들이 거리끼는 사마리아를 의도적으로 지나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게 되었는데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우물가에 앉으셨는데 때는 낮 12시경이었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라며 반문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한 족속으로 유대인의 혈통과 종교를 더럽혔다고 해서 그들을 멸시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반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대답하십니다. ‘(요4:1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에 그 사마리아 여인이 ‘선생님,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런 생수를 구한단 말씀입니까? 이 우물을 우리에게 준 우리 조상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가축이 다 이 물을 마셨습니다. 선생님은 야곱보다도 위대하십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요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이 있다.’는 말씀에 그 여인은 ‘선생님, 그런 물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고 하자 예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고 뜬금없이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고 하자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나 지금 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도 사실 네 남편이 아니고 보면 네 말이 맞다.” 고 하셨습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인이 과거에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정부(情夫)와 살고 있음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갑자기 화제를 돌리셔서 여자의 사생활과 죄를 폭로하신 것입니다. 이에 화들짝 놀란 그 여인이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선지자이십니다...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오실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고 하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야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여자가 물통을 버려 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다들 와서 좀보세요! 나의 과거를 죄다 말해 준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하자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과거를 죄다 말씀하셨다고 증거한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참으로 ‘목마른’ 삶을 깨끗이 해결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 정확히 시간을 맞춰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에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주리고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요4:1-42)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양 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지니고 삽니다. 특히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의 현실적 부귀를 비교하여 상대적 목마름에 시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갈증은 바로 영혼의 갈증이라 하겠습니다. 수백 세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지상의 갖가지 쾌락의 잔들을 홀짝거려 오면서 그것들에게서 궁극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의 즐거움은 잠깐 동안”(시 90:5, 벧전 1:24)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렇습니다. 세상에 속한 즐거움의 꽃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들어 죽을 것들입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성과를 이룩하여 부와 명성과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는 자들이 주위에 그렇게도 많은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마신다면, 오히려 갈증은 더해지고 종국에 가서는 목이 타서 죽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참된 만족을 찾으려 한다면 신기루를 쫓다가 모래알만 씹듯이 좌절과 절망으로 인생을 끝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수천만금의 재산이 있어도, 달나라를 가는 지식이 있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해도, 절세 미인이라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주리고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며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신앙생활로 영육간에 윤택한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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