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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4번의 할렐루야 (계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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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의 할렐루야 (계 19:1-10)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사라진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고 사라질 것 같지 않던 나라가 바다에 던져진 큰 맷돌 같이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요한계시록 17, 18장은 바벨론이 사라지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사실 역사 속에 나타난 제국들은 사라졌다.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등 그들은 사라졌다. 마지막 때, 모든 세계를 통합하고 종교적 바벨론을 이용해 먹던 정치적 바벨론! 다른 말로 하나의 정부를 이룬 바벨론 제국,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소멸된다.

현재의 최강 대국은 미국이다.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한다. 유럽 연합이 경제 블록을 앞세워 패권을 잡아보려고 한다. 누가 패권 국가가 되어지든지, 가령 중국이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미국이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성경은 말한다. 열국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사치를 행하고 돈벌이 하는 상인들이 그와 더불어 매매하고 부를 쌓았지만 미국, 중국을 능가한 정치적 바벨론 정부는 기필코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를 믿어야 한다. 지상의 도성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그 바벨론 심판이 완료되었을 때 요한계시록 19장은 그 바벨론 심판에 대한 찬양이다. 이 환희의 찬양은 다섯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다.

① 계19:1~2 하늘의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찬양함

② 계19:3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심판을 찬양함

③ 계19:4 이십 사 장로들과 네 생물이 찬양함

④ 계19;5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이 찬양을 요구함

⑤ 계19:6~8 ‘우리들’로 표현된 교회가 찬양함

그러나 네 번째 단락인 계19:5은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찬양의 요구함이기에 환희의 찬양은 4개로 되어 있다. 즉 “할렐루야”가 나오는 그대로 계19:1, 2~3, 4, 6절이다. 
  

1. 첫 번째 할렐루야 (계19:1)

계19: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의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Hallelu-jah를 헬라어로 음역하여 알렐루야로 사용했다. 시편에 가서 보면 시편 146, 147, 148, 149, 150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할렐루야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으면, 설마하던 구원이 이루어졌으면 연속 할렐루야가 여기 기록되었겠는가?

첫 번째 할렐루야의 이유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외쳐진 것이다. 여기 구원이란 의미는 바벨론의 정치적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불의한 권세에서 놓여졌다는 구원이다. 성도는 오랫동안 사단의 소굴인 바벨론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그 사단의 소굴인 바벨론이 무너졌으니 성도의 탄원이 끝난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언제까지 내 가족, 내 이웃, 내 형제가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하고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가?’ 이것이 종결되어 더 이상 눌려 있지 않게 된 구원이다. 할렐루야 노래함이 마땅하다. 

보라 계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바벨론의 정치적 권세는 고통의 피, 눈물의 피, 순교의 피를 흘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이 무너지므로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할렐루야인 것이다. 오늘날 21세기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10대 국가가 있다. 그 나라들이 신앙의 자유를 준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만 가지고 할렐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를 제패하는 적그리스도의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할렐루야다.
  

2. 두 번째 할렐루야 (계19:2~3)

계19:2을 보면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셔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된 이유는 피값을 갚으시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 피값을 갚아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늘로 그 핏소리가 올라간다. 

계6:9~10을 보라.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한다. 순교자의 피는 반드시 갚아주신다. 그 신원의 날까지 순교자의 호소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 앞에서 순교한 믿음의 예배가 아벨을 보라. 가인이 아벨을 죽여 놓고도 “나는 알지 못하나이다” 할 때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바벨론이 무너진 것은 참되고 의로운 피 값에 대한 심판이기에, 그리고 아무도 그 피 값을 요구한 심판을 가로막을 수 없기에 할렐루야인 것이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는 바벨론에 내린 심판의 연기가 사람들에 의해 꺼지지 않고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피값을 갚는 심판을 막을 자가 없다. 피 흘리게 하는 박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의 피 흘리게 하는 나라, 조직, 그룹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를 피 흘리게 하는 개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할렐루야 (계19:4)

계19:4을 보면 여기서는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 외친다. 이들의 할렐루야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의 찬양 앞에 화답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십 사 장로들, 네 생물들, 하늘의 허다한 무리들,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되어 찬양하는 할렐루야인 것이다. 이십 사 장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이고 네 생물은 천천 만만에 이르는 천사들의 대표이고 허다한 무리는 할렐루야로 기뻐하는 성도들이다. 구원과 심판이 얼마나 정의롭고 올바른 것인지 하늘의 모든 무리가 아멘 할렐루야로 찬양이 절절을 이루며 모두 하나되는 것이다.
  

4. 네 번째 할렐루야 (계19:6)

계19:6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할렐루야를 부르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수 천 년간 하나님의 백성이 염원해 온 것은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계19:6에 와서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다.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을 통해 사단의 소굴이 된 세상 나라를 심판하므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젠 완성되는 것이다. 

이미 계11:15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요한계시록 19장에 와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어찌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히 할렐루야 우렛소리 같은 소리로 환희의 찬양을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까닭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양은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아내는 그의 교회, 즉 성도들이다. 성도는 예수의 신부로서 무엇을 준비했는가? 혼인 예식에 참가하기 위해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다. 즉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는 동사는 세마포 옷을 입도록 옷을 입는 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나타내는 거룩의 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 기쁨, 그 즐거움, 할렐루야를 연호해도 4번의 할렐루야가 아니라 할렐루야를 100번, 1000번 해도 모자란 기쁨인 것이다.

요한은 이 할렐루야 소리를 들었다. 계19:1~8에서 들었다. 그런데 계19:9에서 천사는 말한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된 자들이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에 혼인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혼인 기약의 날이 이르렀으니 그의 신부로 서게 되는 성도는 정말 복이 있는 것이다. 세상 최고의 복,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 최고의 복, 천상 최고의 복이다. 

신부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가깝고 친밀한 신분의 뜻이다. 신부는 아름답지만 주님의 신부라는 말만큼 가까운 표현의 말이 있는가? 그러기에 어디에도 없는 복을 성도는 받은 것이다. 음녀 바벨론은 망하지만 거룩한 신부인 성도는 주님 곁에 서 있다. “혼인 청함을 받은 자 복이 있도다.”고 전해주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그 발 앞에 경배하려는 요한, 요한은 그 복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그때 계19:10을 보면 천사는 말한다.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신부의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경배 대상을 잊을 뻔 하였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대해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다음 시간에 볼 것이다. 다만 바벨론이 무너지고 구원이 완성되는 이 할렐루야의 노래가 천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노래임을 기억하자. 성도는 바벨론이 무너질 때 예수의 거룩한 신부로 세워지고 주님 곁에 있게 된다는 두 절묘한 대조를 기억하라. 결국 음녀는 이길 것 같으나 무너지고 패하고 성도는 환난과 고통을 당해 망할 것 같으나 승리자인 것이다. 지금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는데 거룩한 신부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 아무리 바벨론 음녀가 미혹해도 세상의 가치 앞에 흔들리고 배반해서는 안된다.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그 영광스러운 주님과의 혼인 잔치를 지키지 못하면 안된다. 주님의 신부로 서는 날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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